한국일보

중용의 덕

2000-11-2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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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포먼 칼럼

▶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교수

사람 사는 사회는 어느 곳에서나 덕스러운 행위를 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덕을 소유하고있기 때문이 아니라 희귀하기 때문에 덕을 행하도록 권면한다. 예를 들어 ‘평화 (샬롬)’는 유태인들과 아랍인들이 가장 경외하고 추앙하는 덕이다. 그러면서도 왜 중동지역에서 평화를 성취하기가 이처럼 어려운가?

서양 문화의 중심인 크리스천 교리가 사랑이다.‘사랑’은 미국사회에서도 가장 고귀한 덕행으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이다. 그러면서도 왜 미국에서 사랑에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 이처럼 많은가?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양에서‘중용’의 덕은 많은 현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이다. 밸런스의 상징인 태극기를 보라.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는 서클과 선이 보여주듯이 중용은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고귀한 덕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태극기에 표현된 평정이 한국사람들의 기질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람들의 성품에서 뜨겁던가 차갑던가, 좋아하던가 싫어하던가, 사랑 아니면 증오하는 등 극단적인 기질이 엿보인다. 완화나 중용을 일상생활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며칠 전 샌프란시스코 크라니클지에 현대기업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몽구라는 형이 몽헌이라는 동생을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대기업의 주권력을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형제싸움에서 주도권을 동생에게 빼앗긴 형 몽구가 동생인 몽헌에게 화가 나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두 형제가 서로 돈을 빌려주면서 베일아웃을 하였는데 지금은 서로 말도 하지 않는 사이이기 때문에 현대기업이 구제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와 같은 싸움은 비즈니스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불교스님들끼리 싸운다는 것이 사실일까? 승복을 입은 사람들이 승려인 상대편에게 돌을 던지면서 몽둥이를 손에 쥔채 공격하는 장면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누가 주지승이 되는가 하는 권력 다툼이었다고 기억한다. 속세를 떠나 덕을 닦는 스님들이 싸우는 뉴스를 보면서 크리스천들은 저렇게 유치하게 행동하지 않겠지 하는 비판적인 생각을 한적이 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포트랜드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장로들이 목사를 쫓아내기 위하여 설교 중에 강단 위에 올라가서 목사를 끌어내리는 장면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교인들이 얼마나 창피하였을까! 사랑이 미움으로 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다툼은 가족간에도 흔히 일어나는 것 같다. 아내의 가족은 6형제가 있다. 형제들끼리 죽자 사자하다가, 한 형제로부터 전화가 뜸하다하면 그 사이에 의견충돌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한번은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 의견이 두 편으로 갈라졌는데 중립을 지키고 있던 아내에게 여동생이 전화로 포섭을 한다는 말을 듣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정치하는 사람들 같다고 아내를 놀리면서 청군 백군 중에 누가 이겼느냐고 물었다.

아내식구처럼 나의 식구도 6형제가 있다. 형제들끼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고있기 때문에 아내형제들처럼 끈끈한 사이가 아니다. 서로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자녀들을 바꾸어 가면서 방문하거나 휴가를 같이 하거나 하지 않는다. 아내의 형제들처럼 만나면 밤을 새워가면서 울고 웃고 대화하는 기억이 없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거래하는 사이인지라 가슴아픈 일도 실망할 일도 없다. 그리고 형제간에 가슴을 설레게 하는 기쁨 역시 격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삶을 열정적으로 사는 한국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 대체적으로 바람직하지만, 진정한 삶은 극단적으로 경험할 때 부유하게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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