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 죽여 주시요”

2000-11-2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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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칼럼

▶ 이 철 (주필)

한인집에 도둑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뒤지는 곳이 있다. 냉장고다. 미국인들이 들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되겠지만 좌우간 한인들은 은행이 아닌 냉장고에 현찰을 숨겨 놓는 것이 습관화 돼 있다.

봉급쟁이나 돈없는 사람들은 “숨겨둘 돈이 어디 있느냐”면서 설령 돈이 있다 하더라도 냉장고는 절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당신에게 몇만달러가 갑자기 생겼다 하자. 집안에 숨겨둘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한번 체크해 보면 냉장고에 돈 숨기는 사람들의 심리가 이해된다.

현찰을 숨겨가며 장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집안에 돈 감출 곳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침대 밑도 그렇고, 천장은 불편하고, 차고는 너무 썰렁하고, 옷장에는 안심이 안되고. 그나마 마음 놓이는 곳이 냉장고의 생선이나 고기 얼리는 구석인데 이것도 이제는 소문이 나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은행 귀중품 보관함을 이용하지 그러느냐고 하면 “매일 돈을 넣었다 가져 가야 하는데 불편하다”고 대답한다. 돈이 자꾸 쌓이면 그 때는 냉장고 가지고는 안될텐데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 보면 “그게 바로 고민”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 돈은 한국에 가지고 나가 예금한다고 한다. 이런 행복한(?) 고민을 하는 한인들은 대부분 현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서 걱정인데 어떤 사람은 돈을 감추지 못해 걱정이니 세상은 정말 공평하다.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똑같이 걱정하게 되니 말이다.

미국 사람들도 리커 스토어를 하고 일본인들도 마켓을 한다. 그런데 강도는 유난히 한인 리커 스토어에만 심하다. 강도들에게만은 한인들이 인기 1위인 것 같다. 왜 코리언들이 강도를 많이 당할까. 캐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꼭 현찰 장사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다. 70년대에 있었던 에피소드인데 정주영씨도 미국 여행하다가 호텔에서 현찰 35만 달러를 도난당해 아우성친 적이 있다. 당시 외화유출이 어려웠던 시절이기 때문에 외환관리법에 걸릴까봐 도난당하고도 쉬쉬했으니 기막힌 노릇이다.

군 4성장군이 미국의 한국식당에서 강도에게 털린 적도 있다. 샤핑하느라 돈을 펑펑 쓰니까 이를 눈여겨 본 강도가 식당까지 미행해온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 노인들도 은행에 돈을 예금하기 꺼려 한다. 웰페어 관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무엇보다 현찰을 집에다 두어야 마음이 든든한 것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P씨의 어머니는 한국에서 재산을 정리해 미국에 이민왔기 때문에 현찰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P씨의 어머니가 어느날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 가셨다. 자식들이 노인 아파트에 와서 유품을 정리하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돈이 안보이더라는 것이다. 냉장고를 뒤져 봐도 없었다. 어머니가 현찰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식들은 밤새 뒤진 결과 나중에 며느리의 힌트로 이불을 뜯어 본 결과 거기서 돈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꿀은 파리를 부른다. 현찰을 숨겨 놓으면 도둑이 노린다. 그런데 문제는 도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찰을 뺏기 위해 목숨을 노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몇백달러 때문에 살인도 하는데 몇만달러가 집에 숨겨져 있는 것을 알면 강도 아닌 사람도 강도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돈은 행복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을 부른다. 현찰을 집에 쌓아 놓는 것은 “나 죽여 주시요”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요즘 한인사회에서 아들이 계부를 청부살해한 사건이 화제다. 동기는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이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집에 현찰을 많이 둔 것이 아들의 입을 통해 친구들에게 알려졌고 이것이 비극의 씨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즈니스를 정상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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