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혐오성 차별주의자들

2000-11-2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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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수<뉴욕한인회 사무총장>

버지니아 서남부, 산세 좋고 한가한 농촌의 작은 도시들. 사업관계로 이 한적한 곳에 잠시 머물고 있는 서울에서 온 박 상무. 그의 미국 인상기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타이어를 칼로 난도질했어요. 그것도 은행 주차장에서 말입니다.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그들의 인상은 정이 떨어집니다.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미소를 본 것은 자재를 사러 드나들던 몇달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것들이 백인들의 본심이냐” 묻는다.


이런 곳에서 10여년을 산다는 김씨의 생활체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흑인이 눈에 띈다 해서 동양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가 외에는 중국식당이 없어요. 이 한 마디가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만년 불청객이란 말이다.

타이어 사건을 들은 본토박이 프랭크 회장은 다음과 같이 그의 심정을 들려준다.

“슬픈 일입니다. 낯선 사람과 이웃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닙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 백인우월주의자들, 전 인구의 30%에 이른다는 그들의 대부분은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

미국 전역에 바둑판처럼 널려 있는 작은 도시들은 도시 형성의 같은 모델을 갖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곳에 공장이 서고 사람들이 직장을 찾아 몰린다. 도로를 내고 상가가 이루어지고 지방자치의 틀 속에서 자리 잡는다. 그들은 마을의 특징을 내세우며 자부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를 세계에 내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이 문을 닫거나 생산 감축으로 감원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값싼 상품의 범람으로 경쟁력의 상실 때문이다. 그들은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시장경제니 국익에 관한 일이라느니 하는 경제이론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갓댐 잽, 갓댐 칭 그리고 갓댐 코리아에 대한 앙심을 품는다. 이 나라들이 수입품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와 피해의식이 본래 갖고 있는 인종차별에 얹혀있어 단순한 인종차별보다 심각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런 것을 사회심리학에서는 혐오성 차별이라고 해서 단순한 인종차별과 분류한다.

불현듯이 팰리세이드 팍 지역의 주민과의 불화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가 보았던 몇몇 작은 도시들,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이곳 사람들, 다른 것이 있다면 뉴욕이라는 대도시와 인접하고 있다는 지형적 조건 하나뿐, 인구래야 1만5,000명, 넓이 10평방마일의 이 작은 도시, 그들은 한인들이 자리잡기 오래 전부터 과테말라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인을 거부한다.

“한인들이 처음 모습을 나타냈을 때 이곳 주민들은 그들이 금세기 초 걸어온 전철을 밟는 그런 사람들이라 생각했어요” 샌디 퍼버 시장의 말이다.
서로가 협조하고 친절했던 옛 시대를 되뇌인 것이다. 가족과 더불어 거리를 거닐며 주말을 즐기던 정서를 빼앗긴 토박이들이 외국 여행객이 된 심정이라고 어떤 이는 불평한다.

폐허가 되어가던 곳을 재건한 공을 이제 그들은 잊은 것인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웃을 의식하며 사는 노력” 이것 하나 남겨준 교훈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내 하기에 달려있다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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