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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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의 판도라상자

2000-11-2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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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동 (본보 시카고지사 편집국장)

플로리다 주정부가 조지 W 부시 후보를 공식 승리자로 선언하면서 대통령선거 개표전쟁이 절정에 달했다. 이제 연방대법원 판결이 선거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진흙탕 싸움처럼 보이는 미국 대통령선거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다. 미국이 민주주의 딜레마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는 미국 민주주의 수준과 시민의식을 가늠해 볼 수가 있는 정치 측정계가 되고 있다. 나는 개표 전쟁을 지켜보면서 미국인들은 감정을 절제하고 억제할 줄 아는 상당한 정치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러면서도 미국 정치가 점차로 쇠퇴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정치 대신에 법치의 자리가 넓어지고 있었다. 법의 크기가 커질수록 정치는 왜소해지고 결국 정치는 법의 족쇄를 찰 수밖에 없어진다. 한국처럼 법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법치주의가 정의로 가는 길이고 선진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법치주의를 거쳐야 하지만, 미국처럼 법치주의가 만개한 사회에서는 지나친 법치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와 문명이 지속하고 영속하는 균형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법치가 지나치게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법치가 커져서 정치가 약해지고, 법치가 거미줄처럼 퍼지면 그 사회는 인간성이 상실해 가는 사회가 된다. 오늘의 미국은 그런 현상을 보여주고, 이번 대통령선거는 그런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가의 기량이나 비전, 애국심 대신에 변호사나 법조인의 법리와 이론이 지배적이 되면 사회가 협량해지고 끝없는 불신과 분쟁을 잉태하게 된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재판정으로 간 것은 불행이고 미국정치의 한계점이 되고 있다. 미국 정치의 미덕이었던 승복과 신사도가 흔들리고 있다. 연봉 700만달러짜리 변호사들이 정치 재판소에 들어오게 되면 정치는 정신과 인격을 잃게 된다. 변호사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겨야 하는 직업인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치를 오염시키고 타락케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재판을 통해 그것을 절실하게 경험했다.

플로리다주 선거가 워낙 무승부에 가까운 선거라 어느 한쪽을 비판하기가 힘들만큼 양쪽 모두가 일리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 손으로 재검표하는 것을 찬성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수검표는 실수였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다. 인간을 격하시키는 작은 판도라 상자를 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딤플 밸럿(보조개표), 프레그넌트 차드(임신한 표)가 논쟁의 중심이 되면서 유권자들의 투표 의도를 인간이 결정해야 하는 혼란을 겪었다. 투표 방법이 손으로 개표를 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기계로 하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예상치 않았던 갖가지 분쟁이 속출했다. 그리고 지방자치제를 중요시하는 미국은 주정부의 카운티에 따라 유효표 무효표를 가리는 기준이 다르고, 손으로 재개표를 하느냐도 카운티 재량이기 때문에 결국 원래 의도했던 민의나 공정성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없게 되었다.

고어측이 주장하는 "모든 투표가 정당하게 계산되어야 한다"는 말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민의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은 민주주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공화당의 "특정지역만 주관적으로 계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민의가 공정하게 반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법이 이것을 가려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고어측 주장대로 민의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부시측 주장대로 민의를 공정하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유효표와 무효표의 기준을 통일시키고, 플로리다주 전체 모두를 수개표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아니면 수개표를 아예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수개표를 모두 하기에는 시간이 늦었다. 이런 점에서 플로리다주 대법원은 잘못된 판결을 했다.

플로리다 주대법원이 판결을 내릴 때는 주전체가 수개표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공정한 법정신과 나라를 생각하는 염려가 있었다면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제 모든 열쇠는 연방대법원이 쥐고 있다. 연방대법원이 주정부 일에 간섭하지 않는 연방정신을 넘어서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와있다. 연방대법원은 법조문에 매달리는 법치주의가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는 정신으로 판결을 내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9명의 대법원 판사가 미국의 대통령을 결정하는 역사를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역사의 순간은 부시나 고어 가운데 한 사람이 나라를 위해 훌훌 털고 양보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실의 패자는 역사의 영웅이 될 것이다. 함께, 미국 정치가 갈채와 감동의 무대 위에 우뚝 설 것이다. 그런 현실은 오지 않겠지만 미국 정치는 아직 그런 희망을 걸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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