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참회의 눈물

2000-11-25 (토)
크게 작게

▶ 기자수첩

▶ 황성락(사회부 차장대우)

치노힐스 이정복씨 피살사건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했던 4일 낮 듬직한 체격의 청소년이 검정색 픽업트럭을 거라지 앞에 세워놓고 내리고 있었다. 온순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이 청소년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채 짐칸에서 물건을 내려 안으로 갖고 들어가는등 무척 바쁜 모습이었다. 그때까지 이 사건의 정확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기자는 그에게 다가가 "이 집에 사느냐"고 묻자 자신이 막내아들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전날 밤 있었던 일들을 비교적 소상히 알려 준 뒤 자리를 떴다. 현장 부근에서 간단한 주변취재를 마친 뒤 다시 집앞으로 가자 그 청소년이 막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장례식을 위해 아버지의 사진을 확대해 가지고 오는 길이었고 기자의 요청에 순순히 아버지의 영정을 동료 기자가 촬영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매일 샌버나디노 셰리프국에 전화를 걸어 새로운 수사내용의 여부를 물었고 공보관은 그때마다 ‘아직 수사중’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러던중 지난주 처음으로 중대한 진전이 있다는 귀뜸을 해줬고 마침내 용의자의 신원을 받았던 21일 아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름아닌 숨진 이씨의 의붓아들 김대성군, 사건 다음날 만났던 바로 그 청소년이었다. 면심범의 소행이라는 추정은 해왔지만 김군이 용의자일줄은 전혀 생각치 못했기 때문에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곧바로 긴급회의를 가진 뒤 취재에 들어가 김군이 모 재활센터에 수용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진기자와 함께 그곳으로 가 주차장에서 기다리던중 승용차 한 대가 멈춰섰고 안에서 권총을 찬 수사관들이 수갑을 들고 내렸다. 얼마후 수갑을 차고 수사관들과 함께 나타난 김군은 집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 모습으로 우리를 말없이 쳐다봤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의 그는 아무 소리없이 차에 올라타 카운티 교도소로 향했다.

올해 나이 19세인 김군이 사건후 보여준 행동이 기가 찰 노릇인 것도 숨길 수 없는 것이지만 어린 나이에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그가 겪어야 했을 고통과 후회를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울 다름이다.
김군은 교도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참회의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용서를 구하면서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면 착하고 바른 사람이 되고 싶다"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살아온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야 할 그가 차가운 교도소 안에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이같은 비극을 불러오지 않았을 그가 뒤늦게 흘린 참회의 눈물은 정말 진심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