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선과 내년 경기

2000-11-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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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코노미스트

▶ 민경훈 (편집위원)

90년대의 호황이 누구 덕인지를 놓고 지난 선거 때 치열한 입씨름이 벌어졌었다. 고어쪽은 당연히 클린턴 행정부가 잘 해서 그렇게 됐다고 주장했고 공화당은 의회 다수당인 자기들 때문이라고 우겼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호경기는 어느 한쪽의 덕이 아니라 행정부와 의회를 양당이 나눠 가짐으로써 일방이 무모한 정책을 펴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최근 예를 봐도 미국이 90년초 불황에서 완전히 빠져 나온 것은 94년 공화당이 상하원을 장악하면서 부터였다. 백악관은 공화, 의회는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던 80년대도 경기가 좋았던 반면 백악관과 의회를 민주당이 독식하고 있던 76년부터 80년까지는 불황이 극심했다. 미국민들은 분열된 정부를 좋아한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왔다.

미 국민들이 진정 분열된 정부를 원했다면 그 소원이 이처럼 정확히 실현되기도 힘들 것이다. 연방 상하원은 물론 대통령 총 유효표와 선거인단수도 더 이상 근소하기 어려울 정도의 표차로 딱 반으로 갈라졌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3주가 됐는데도 아직 누가 대통령인지 분명치 않다. 현재로서는 부시가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 플로리다 3개 카운티에서 진행되고 있는 수검표가 끝나면 결과는 얼마든지 뒤집어질수 있다.


지금 양측 논쟁의 핵심은 투표용지에 구멍을 뚫었을 때 생기는 종이 조각(chad)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고 달라 붙어 있을 때 이를 표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민주당쪽에서는 구멍이 뚫리기만 하면 종이가 붙어 있건 떨어져 나갔건 유효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멍조차 뚫리지 않고 누른 흔적만 있는 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민주당에서는 누른 흔적만 있어도 유권자가 의사를 표시했다고 볼수 있는 만큼 유효표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면 공화당에서는 유권자가 표를 찍으려다 마음을 바꿔 끝까지 누르지 않을수도 있는데 이를 표로 간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맞서고 있다. 누른 흔적이 있는 차드는 임산부처럼 배가 나왔다고 해 ‘임신한 차드’(pregnant chad)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런 경우 플로리다 주법은 카운티 별로 선관위가 유권해석을 하도록 하고 있다. 민주당이 수검표를 요구한 3개 카운티 선관위원이 대부분 민주당원인데 공정한 결정을 할수 있겠느냐는게 공화당의 주장이다.

수검표 결과를 최종 집계시 포함시켜 달라는 고어측 요청에 따라 지금 심리중인 플로리다 주대법원이 부시쪽 손을 들어 준다면 선거는 사실상 끝난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판사 7명 전원이 민주당 쪽에서 지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금요일에도 고어측이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주대법원은 주총무처장관의 최종 집계 결과 발표를 금지하는 명령을 자진해서 내렸다. 주대법원이 수검표를 포함시라고 명령할 경우는 얘기가 길어진다. 부시측이 수검표의 불공평성을 들어 계속 물고 늘어질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가 근소하게 나오자 처음에는 어느 쪽도 상대방 눈치를 보며 조심스런 정치를 펼 수밖에 없게 돼 차라리 잘 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어느 쪽이든 대국적 견지에서 너그럽게 패배를 시인하면 다음 대선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란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쪽의 비난은 강도를 더해가고 ‘갈 때까지 가보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돌아서고 있다.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돼도 진 쪽은 4년 내내‘선거를 도둑 맞았다’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게 분명하다.

미국은 지금 전세계 투자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의 하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정치가 안정돼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를 봐도 정치는 불안한데 경제는 무럭무럭 자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일 누가 어떤 정책을 펼지 모르는 상황에서 투자가나 기업인이 안심하고 경제활동을 할수 없는 탓이다.

미국 경제는 고어가 대통령이 되든 부시가 대통령이 되든 굴러간다. 그러나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 오래 계속 되거나 대통령이 된 사람의 정통성이 의심받는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1828년 유효표에서 지고 대통령이 된 존 퀸시 애덤스나 1888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이 된 해리슨은 집권 4년동안 죽을 쑤다 재선에서 참패한후 물러났다. ‘임신한 차드’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과연 권위를 인정받을수 있을까.

시장은 불확실성을 혐오한다. 미국 경제 성장의 둔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는 지금 나날이 추해지고 있는 대선 시비는 반가운 뉴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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