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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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못할 추수감사절 만찬

2000-11-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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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현<알리타>

덴마크 태생 카렌 블릭센이 아이작 디네센이란 필명으로 내놓은 ‘바베트의 만찬’이란 작품이 있다. 노르웨이의 가난한 마을에 금욕주의적인 루터교의 목사가 교인이 적은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교인들은 세상을 철저히 등지고 살았다. 옷도 까만색 일색으로, 음식은 맛없는 묽은 죽 같은 것으로 이 세상의 어떤 쾌락도 등지고 살았다. 부인을 잃고 혼자된 늙은 목사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15년이 지난 후 아버지 목사는 사망하였고 이제 중년에 이른 두 자매는 독신으로 아버지의 사명을 잇고 있었다. 목사의 엄한 통제가 없어지자 교인들의 관계는 나빠진다.

어느날 밤 두 자매 집앞에 어느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프랑스혁명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자신마저 목숨이 위태로워 피신온 바베트. 그는 12년동안 두 자매를 위하여 일을 한다. 12년만에 바베트에게 프랑스에서 편지가 왔는데 바베트의 복권이 당첨되어 만프랑의 상금을 타게된다. 바베트는 두자매에게 마침 돌아가신 목사님의 100세 생신기념잔치를 차리게 해달라고 한다. 바베트는 최고급의 프랑스 요리를 준비한다.

갖가지 요리재료를 사가지고 온 그녀는 이 교인들이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진수성찬을 차리고 11명의 전 교인들을 초청한다. 테이블에는 근사한 그릇과 유리 잔, 실내에는 촛불과 나무로 장식이 되고 그 음식을 먹으며 관계가 나빠진 교인들은 화해를 한다. 바베트는 파리에서 유명한 식당의 명성높은 주방장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 스토리를 처음 알게된 것은 수년 전 추수감사절 주간을 맞이하여 우리교회 목사님이 설교에서 인용하였을 때였고 우연히 그해 크리스마스시즌 PBS에서 상영하여 영화로 보았다. 최근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란 책 속에서 인용한 것을 다시 읽었다. 필립 얀시는 이 책속에서 바베트의 만찬을 은혜의 관점에서 기록하였지만 나는 최고의 정성이 깃들인 멋진 식사에 비유하고 싶다.

이 이야기가 나의 마음속에 감동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나도 바베트의 만찬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0년전 우리는 밸리로 이사왔다. 그 해 11월 초 나는 수술을 하였다. 주위는 추수감사절 축제로 가득차 있었지만 우리집은 추수감사절 만찬을 생각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해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는데 같은 타운하우스 안에 살고 있는 한인 젊은 부부가 터키를 구워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식사 준비하면서 테이블 세팅을 미리 하는 습관이 있다. 냅킨과 수저, 때에 따라서는 나이프와 포크, 음료수잔, 접시 등, 촛불과 꽃은 내가 즐겨 애용하는 장식품이다.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좋은 그릇을 쓰는 경향이 있지만 난 우리 식구만의 식사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그릇을 사용한다.

그날, 아직 어린 세 아들은 엄마의 취향을 알아서 저희들이 테이블 세팅을 하며 엄마가 좋아하는 촛불도 켜놓았다. 드디어 도어벨 소리와 함께 두 부부가 무겁게 들고들어오는 음식을 보고 우리 온 가족은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잘 구운 터키와 그레이비, 스터핑, 매시드 포테이토, 얨, 크렌베리, 옥수수 …사랑과 정성이 깃들인 따뜻한 마음으로 준비한 훌륭한 만찬이었다.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하면 나는 그날 가졌던 감동으로 벅차 오르며 고마운 마음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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