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축복받은 아기

2000-11-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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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재선<업랜드>

40대 중반 한인 여성으로 7세나 아래인 미국인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웃이 있다.

그동안 아기를 갖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왔고 많은 돈도 허비한 케이스다. 시부모가 그에게 몸도 약한데 늦게 아이 갖으려고 애쓰지 말고 양자를 삼아 데려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면하는 말을 많이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미국인들의 생각이 한국인들의 사고방식과는 너무도 다르다고 느꼈다.

한두살만 연상의 여자와 결혼을 한다 해도 펄펄 뛰는 한국부모의 사례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거기에 국제결혼이라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특별히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서라면 손녀보다는 자기 핏줄을 이을 손자를 낳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일로 인해 많은 젊은이들이 상처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 정서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내가 아는 어느 분도 아들 3형제에서 작은아들이 벌써 손자를 낳았음에도 맏아들이 딸만 셋을 두었다고 해서 아들을 낳을 때까지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내 것에 대한 의식이 굳어있나를 볼 수 있다.


나이 많은 며느리의 상처를 감싸주고 사랑으로 덮어주는 미국 시부모님의 배려가 바로 이 땅에서 우리가 닮고 배워야할 의식이 아닌가 싶다.

지난해 말께 이 부부는 아기를 갖기 위한 모든 노력을 버리고 마음으로 할까 말까 갈등하던 끝에 한국 아기를 데려오기로 결정하고 지난봄에 아기의 생년월일과 사진을 받게 되었다.

이들의 기쁨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큰 기쁨이 되고 아기가 오는 날짜를 잡아놓고 자기 자식임을 확인하듯이 사진을 들여다보고 아기가 있을 방을 두 내외가 페인트칠도 하고 그림도 그려 붙이고 액자도 걸고 인형도 사다놓고 마치 귀공자 방처럼 장식하며 좋아했다.

마침 아기가 왔다고 전하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가 보니 벌써 콜로라도의 시이모가 와있고 동부의 시부모도 자기 가정에서 30년만에 처음으로 손자가 생겼다고 곧 휴가를 받아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가슴이 찡- 했고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한국식으로 보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한국에서 데려온 아이가 어찌 미국인의 손자가 된다는 말인가! 자기 아들과 며느리의 선택을 무조건 존중해 주고 수용할 뿐만 아니라 버려진 한 생명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자기들의 친손자로 인정하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생각의 폭이 이렇게도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게도 많은 은혜를 입고 살면서 다른 사람을 끌어안는 데는 한없이 이기적이고 야박스러워야 하는지… 많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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