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딩구는 낙엽을 보며

2000-11-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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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 진혁<교수>

바람이 제법 부는 쌀쌀한 가을의 어느 토요일입니다.
아직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이른 새벽에 큰길을 따라 차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서 차를 멈춥니다.
많은 낙엽들이 길옆에서 우루루 몰려나와 떼지어 다니기 시작합니다.
바람결에 따라 차선에는 아랑곳없이 이리 저리 몰려가기도 하고, 빙그레 돌기도 하고, 공중으로 치솟기도 하고....


어릴 때 동네 개구쟁이 친구들과 골목길을 좁다하며 뛰어 다니던 모습 같습니다.
술래가 되어 달아나는 다른 친구들을 잡으려고 내 달립니다.
숨이 턱에 차지만 노는 재미에 아이들은 지칠 줄 모릅니다.
아이들의 모습은 어느새 민주화를 부르짖는 데모대로 바뀝니다.
분노의 함성을 외치며 무리를 지어 큰길을 행진하고 있습니다.
자욱한 최류탄 연기를 피해 각자 죽을 힘을 다해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담장을 뛰어 넘기도 하고 어디든지 숨을 곳을 찾아 내달립니다.
한 동안 고요가 찾아옵니다.
뛰놀던 아이들도 노도 질풍같이 내닫던 데모대도 사라진 후 길거리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적막감이 젖어 듭니다.
그러다 살며시 낙엽들이 하나 둘 누워있던 땅에서 일어납니다.
처음엔 그냥 원을 그리며 서서히 돌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공중으로 뛰어 오르며 춤을 춥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신나는 장고 소리에 맞추어 춤추는 무당의 모습입니다.
큰길에서 길을 건너다 죽은 개구리, 다람쥐, 고양이등의 넋을 위로하는 살풀이 굿입니다.
차들이 오고 있습니다. 낙엽들은 밟으며 지나갑니다.
갑자기 나타난 훼방꾼들에 항의하듯 따라 갑니다만 금방 풀이 죽어 버립니다.
나도 그제서야 시동을 켜고 가던 길을 갑니다.
베르디의 사계절이란 음악을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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