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생유한

2000-11-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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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덕<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교수>

하늘이 푸르러 가을은 더 시려 보인다. “형부가 십분 전에 임종하셨어” 착 가라앉은 동생의 목소리가 전선을 타고 들려왔다.

2주일 전에 의사들이 포기하면서 이틀을 살기 힘들 것이라고 단정하였기에 제부의 죽음은 예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임종을 확인하는 순간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래”하고 애써 대답을 하는데 귀가 멍멍하여지고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입술은 움직이는데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마 전화가 끊겼다고 생각하였는지 “언니, 언니”하고 부르는 동생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치다가 사라졌다.

키모테라피가 몸에 맞지 않아 고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별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하였지만 정작 운명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럴 수가 없어. 말도 안돼!” 나와 동갑인 제부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어 나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였다.


남편을 잃은 동생과 아빠 잃은 조카 생각에 숨이 막혀 왔다. 나이 어린 조카가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목에 매어있는 울음 주머니는 나 혼자 있는데도 터지지 않아 소리내어 울 수가 없었다. 이제 마흔 조금 넘었는데 동생이 과부가 되다니, 아스라하게 저려오는 아픔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3년전 가을 이맘때쯤 이민온 제부는 오리건의 가을하늘을 보면서 한국 가을하늘보다 더 맑고 푸르다며 산록 속에서 심호흡을 하면서 좋아라 하였다. 한국에서 직업군인으로 은퇴하고 이민온 제부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미국사람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상놈들이지만 그래도 양로원 시스템은 합리적이라면서 미국 찬양론을 펴기도 하였다. 말만 통한다면 한이 없겠다고 하면서, 노력파인 제부는 마치 고시공부 하듯이 대학 도서관에 가서 영어공부를 하였다. 사전을 달달 외우면서도, 내성적인 제부는 막상 미국사람과 부딪치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면서, 영어가 원수라고 말하곤 하였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고 하며 미국에 몇년쯤 살면 영어로 꿈을 꾸느냐고 진지하게 묻기도 하였다. 자기는 꿈속에서도 미국사람을 보면 혹시 말을 시킬까봐 긴장이 되어 식은땀이 나온다고 하여 함께 웃은 적이 있다.

동네 공원에서 산보하면서 제부가 하던 말이 귀에 쟁쟁하다. 노랗게 물들어 바람에 펄럭이며 떨어지는 은행잎을 주우면서 말했다. “언니(나와 동갑이던 제부는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계절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가을철을 살고 있는데, 남은 시간을 보람 있게 살고 싶다”면서 마치 자신의 짧은 운명을 예상이나 한 것처럼 인생의 유한함을 몇번씩 되풀이하였다.

장래 계획을 이야기할 적엔 마치 10대 소년처럼 흥분하기도 하였다. 농부가 되어 흙 속에서 일하며 살고 싶다고 하기도 하였고,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두었다가 통일이 되면 장모님 고향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싶다는 선교의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정쩡한 나이에 이민온 제부는 농부가 되는 꿈도 신학생의 꿈도 접은 후, 조그마한 그로서리 가게 주인이 되었다. 동양인이라고는 한 명도 살지 않는 시골에서 그로서리 가게를 운영하면서 백인 할아버지 할머니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짧은 영어를 미소로 보충하며 이민 연륜을 쌓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국 찬양론이 시들하여지기 시작할 무렵 제부는 몹쓸 암에 걸렸고, 그 후 일년 반을 투병하다가 며칠전 세상을 떠났다. 예고 없이 다가온 제부의 죽음은 바삐 달리는 차에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것 같았다. 젊었기에 그와의 이별은 더욱 더 힘들었다. 제부는 뒤에 남은 친지들에게 삶을 더 깊게 응시하며 삶의 의미를 점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고 갔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이 각양각색이었다. 방향을 잃은 돛단배가 등대의 불빛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신을 찾는 친지도 있고,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겠다고 다짐하는 일 중독자도 있었고, 살아 있을 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제일이지 하는 현실파도 있었고, 삶의 허무함을 한탄하는 허무주의자도 있었다. 기억할 수도 없는 시시한 일로 감정이 상하여 관계가 소원하여진 친지에게 용서를 비는 회개파도 있었고 나무만 보고 숲을 볼 줄 몰랐다고 고백하는 철학자도 있었다.

평소에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생각하지 않던 사람도 장례식에서는 자신의 삶을 한번쯤 돌아본다. 인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운다. 그래서 죽음은 훌륭한 스승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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