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불꺼진 벤처 밸리

2000-11-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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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부 고상호기자

90년대 들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벤처 기업들은 미국내 경제성장의 기폭제가 되어 신화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이 후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는 벤처 밸리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하고 수많은 회사들이 모여들어 24시간 일하며 불을 밝히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이 일대는 마치 한국 경제를 이끌어 가는 핵이 모여 폭발하는 듯한 기세로 발전해 갔고 정부가 지원금까지 제공하자 더 많은 회사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지난주 취재차 서울을 다녀온 길에 본 테헤란 밸리의 모습은 영 딴판 이었다. 수개월째 바닥을 기는 코스닥 시장을 반영하듯 밤을 대낮같이 밝히던 빌딩의 사무실은 불꺼진 채 빈곳이 더 많았고 꽁꽁 얼어붙은 자금시장으로 인해 업체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라 비상이 걸린 모습들이었다. 회사가 문을 닫아 쫓겨난 직원들도 부지기수인지라 이 지역의 호황을 가장 가깝게 반영하던 인근 유흥가는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던 모습에서 졸지에 2년전 외환위기를 맞은 듯한 분위기였다.

20여개의 룸을 갖춘 대형 주점을 기업처럼 2∼3개씩 운영하며 벤처 손님을 맞던 한 업주는 운영난으로 가게를 내놓았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인터넷 기업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회사가 인력감축과 월급 미지급에 이어 비싼 임대료를 피해 이 지역을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어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다며 그렇다고 이전에 다니던 직장으로 돌아갈 수 도 없다며 벤처맨의 정신적 공황을 설명했다.


벤처와는 관련이 없는 대다수 경제인들도 이제는 벤처라는 말에 더 이상 호감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 중소기업체 사장은 벤처의 가면으로 정부 지원금 받아 개인실속 차리는 가짜 회사는 빨리 정리돼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LA한인타운의 사회, 문화적 추세를 가만히 살펴보면 일정한 공식이 있다.
우선 미국내 주류사회에서 발생해 기반을 잡은 것이 한국으로 건너가 끓는물 처럼 뜨거운 유행을 타다가 얼마 후 다시 이곳에 건너와 타운내서 모습을 나타낸다. 한인들의 비즈니스 패턴도 이같은 추세를 비슷하게 따라가고 있는데 최근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닷컴 벤처기업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일명 윌셔밸리라는 호칭하에 타운내 들어섰던 많은 한인 벤처기업들도 이제는 옥석이 가려지고 냉철한 비즈니스 기준으로 재평가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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