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속극도 아닌데 지겹다고 바꾸다니

2000-11-1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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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우섭/풀러튼

요즈음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영어가 과연 세계 공용어라는 것을 실감한다. 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면 축에 끼일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영어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 굳이 영어를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전 세계가 영어 학습의 열기에 휩싸여 있다. 영어의 세계화는 즉 미국의 문화와 제도의 세계화와도 통한다.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미리 예견하고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 산업의 발전을 일찍 주도한 것이 클린턴-고어 행정부이며 이는 그들의 많은 업적 중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혹자는 오늘날 미국의 장기적인 호황이 민주당 정부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내 생각에는 현 정부만큼 경제 호황에 이모저모로 직접적인 기여를 한 정부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젊고 현명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고 판단한 결과를 강력하게 추구해 나가는 추진력이 있는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계에서 막연한 카리스마나 얄팍한 인기, 일시적인 군중 심리, 가문의 후광(한국의 2세 정치인들도 들으라) 등으로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이는 국가의 큰 불행이 될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고어가 너무 잘난 척한다거나 유대인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부시에게 고전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미국 국민들이 건전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부시처럼 말을 더듬고 어수룩하게 보이는 것이 어떻게 국가 정책을 세세한 데까지 잘 이해하고 있는 고어의 명석함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민주당 정부가 너무 오래 해서 지겨우니 이제는 새로운 얼굴로 바꿔 보자는 것이 어떻게 건전한 발상일 수가 있는가. 연속극 드라마라면 이 배우 저 배우 바꿔 가면서 즐길 수 있겠으나 갈수록 치열해 지는 국가간 경쟁 속에서 국익을 보호 발전시켜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길 인물을 어떻게 그러한 기준으로 선출할 수 있겠는가.


이미 미국 국민들의 타락과 정신적 해이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겠으나 플로리다주의 투표와 관련된 말썽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역사적으로 대제국은 그 국민들의 정신이 빛나고 깨어 있을 때에는 절대로 몰락하지 않았다.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 환경을 헤쳐 나아갈 때에 오히려 제국은 더 강해진다. 그러나 배부른 세월이 오래 계속 되고 위기의식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재미없어지고 권태를 느끼게 될 때에, 향락만이 생활의 전부가 될 때에 제국의 몰락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집트 왕국, 통일 신라, 로마 제국, 중국의 역대 왕조, 러시아 제국 등의 역사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흐르지 않는 물이 고 비행기의 기수가 들려 있지 않을 때에 추락하는 것과 같이, 국민의 정신이 깨어 있지 않고 건전한 가치판단 기준을 상실할 때에 그 국가는 쇠락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 지금부터라도 미국 국민들은 대오 각성하고 이제 막 시작된 박스 아메리카나의 역사를 영원히 유지 발전시킬 수 있도록 새로운 행정부를 중심으로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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