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요즘은 딸이 더 낫다던데…”

2000-11-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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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 권정희 편집위원

얼마전 어느 약혼식 자리에서 “아들이 좋은가, 딸이 좋은가”를 주제로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날 약혼한 청년의 부모는 아들만 둘이고, 예비신부의 부모는 딸만 둘이어서 자연스럽게 나온 화제였다. 대개 자녀를 한둘씩 결혼시킨 분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는데 공통된 의견은 “요즘은 딸이 더 낫더라”였다.

“딸들은 친정부모에게 턱턱 용돈을 보내지만 아들들은 부모에게 돈 좀 보내려 해도 꼭 제 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딸만 나은 부인은 업어주고 아들만 나은 부인은 벌로 일을 시켜야 한다”고 60대의 한 남성은 농담을 했다. 그도 아들만 있고 딸이 없는 분이었다.


‘딸이 더 좋다’‘딸은 살림밑천’‘잘 키운 딸 열 아들 부럽지 않다’… 딸에 의미를 부여하는 표현들은 물론 굳건한 남아선호 정서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표현은 각기 달라도 그 말들의 속에 숨은 뜻은 “딸도 잘 키우면 괜찮으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로 일치한다.

가정이건 사회건 남성이 단독으로 주도권을 잡던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아선호는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서 여성이 사회나 가정에서 꽤 많은 힘을 행사하고 있는 데도 ‘우선은 아들’이란 인식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한국의 남녀성비 불균형이 좋은 예다. 아들 욕심에 여아낙태가 성행하다보니 한국에서는 앞으로 10년후면 남자 100명중 17명은 여자가 없어서 결혼을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한다.

자연의 균형까지 깨면서 ‘그렇게 아들을 바라는 이유’를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대답은 간단했다.

“딸도 좋지만 혈통을 이어야지요. 혈통은 아들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딸들이 잔정은 있지만 그래도 미더운 건 아들이에요. 딸은 용돈 정도 대지만 큰일 터졌을 때 크게 돕는 것은 역시 아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있었다. 50대의 주부가 말했다.
“미국에 살면서 자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정 안되면 웰페어를 탈수도 있으니까요. 나이들면서 제일 문제가 외로움인데 마음에서 우러나와 세세하게 부모를 보살피는 건 역시 딸이지요”

지난해 시카고에서 한인노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시카고대학의 김신교수가 한인노인들과 자녀들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어느 자녀가 자주 전화·방문을 하고, 몸이 아프거나 재정적 보조가 필요할 때 어느 자녀가 도움을 주는 지등을 알아보았다. 결과는 아들보다 딸이 주로 부모를 보살피며 특히 맏딸이 가장 부모를 많이 돌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노인들의 태도였다. 대부분 노인들이 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딸이 효녀’라는 말보다는 ‘아들이 효자’라는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현실에 비해 의식의 변화속도가 너무 느린 경우가 있다. 그 한예가 아들·딸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현실이 바뀌면 의식도 언젠가는 바뀔 수밖에 없다. 최근 일본에서는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 못지않게 남아선호 사상이 강하던 일본에서 젊은 부부들 사이에 딸 붐이 일어 ‘딸 낳는 법’을 소개하는 책이나 클리닉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도쿄의 국립인구연구소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아이를 하나만 갖기 원하는 부부중 아들을 바라는 부부가 82년 51.5%였던 것이 87년 37.1%, 97년에는 25%로 떨어졌다. 75%는 자식이 하나라면 아들보다는 딸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딸이 예쁘고, 사내아이보다 키우기 쉽고, 감정적으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꼽힌 것은 노후에 대한 배려였다. 평균수명이 길어져 대개 오래 사는 데 나이 들어 심신이 약해졌을 때 부모를 보살펴주는 데는 아들보다 딸이 낫다는 것이다.

‘아들이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은 우리 가정에 숱한 갈등을 야기시켜왔다. 이제 그 생각은 현실과 거리가 있고, 이미 많은 딸들이 부모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딸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해묵은 남아선호를 벗어버리는 길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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