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승리는 역경뒤에야 찾아온다

2000-11-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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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 Review

▶ 삶을 되찾기 위한 나의 여정

미국인의 스포츠가 풋볼과 야구라면 유럽인의 스포츠는 축구와 사이클이다. 험한 알프스산을 넘어 3주일간에 걸쳐 2,200여마일을 달리는 ‘뚜르 드 프랑스’는 유럽인의 자존심이 걸린 사이클의 수퍼보울이요 월드시리즈다. 미국인 랜스 암스트롱은 절정기인 96년 암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99년 ‘뚜르’를 정복했다. 올해 다시 ‘뚜르’ 2연패에 성공한 암스트롱은 스포츠 칼럼니스트 샐리 젠킨스의 도움으로 쓴 이 자서전을 통해 어려웠던 성장기로부터 암과의 힘든 투병, 그리고 ‘뚜르’ 승리까지의 여정을 꾸밈없이 말하고 있다.

나의 어머니 린다는 17세 때 나를 낳았다. 나의 친아버지와는 내가 두 살 때 이혼했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자랐다. 나의 성 암스트롱은 어머니가 그후 잠시 결혼생활을 했던 테리 암스트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어머니는 5피트3인치 키에 105파운드 체중의 가냘픈 체격의 여인이었지만 나를 키우기 위해 온갖 힘겨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편분류작업, 수퍼마켓 캐시어 등으로 겨우 한달 400달러를 벌었는데 그중 200달러를 아파트 렌트로 내고 베이비시터 비용으로 100달러를 지불하면서도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주고야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사이클리스트로서 성공하기까지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내가 자전거를 처음 접한 것은 7세 때다. 마음씨 좋은 동네 자전거포 주인이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내 어머니에게 감동한 나머지 내게 자전거를 마련해준 것이다. 자전거 바퀴는 내게 있어서 어른들 그리고 규칙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내가 살던 댈러스 교외 플레이노에서는 풋볼이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 나도 풋볼을 시도해 봤다. 그러나 나는 공을 가지고 하는 모든 운동에 젬병이었다. 그래서 달리기를 했는데 달리기에서는 다른 아이들을 제칠 수 있었다. 그 뒤 수영을 시작했고 주챔피언십에서 4등을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수영선수로서 필요한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서 사이클을 탔다.


어느 날 철인경기 포스터를 봤다. 수영, 사이클, 달리기등 세가지 종목을 겨룬다는 것인데 비록 출전 경험은 없었지만 세가지 모두 자신이 있는 터여서 출전신청을 했다. 연습도 없이 참가한 대회에서 2등과는 상당한 시간차로 우승을 했다.

어머니의 테리 암스트롱과의 결혼생활은 불행했고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나를 길들인다며 수시로 때렸다. 어머니가 그와 갈라섬으로써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15세가 될무렵 나는 3종경기로 적지 않은 상금을 벌었다. 때로 16세로 나이 제한이 있는 대회 출전하기 위해 출생증명서를 변조하기도 했다. 16세 때 나는 2만달러의 상금을 벌어들였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는 멕시코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주니어 사이클 대회에 미국대표로 참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이클을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 나는 유럽행을 결심했다. 사이클의 본고장 유럽에 가지 않고는 사이클 선수로 대성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럽 사이클은 그동안 내가 겪은 사이클과는 달랐다. 팀내에서도 서열이 있었는데 나는 독불장군으로 놀다가 미운 털이 박혀 고전했다. 그래도 나는 점차 일급선수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하루 코스의 단기전에서는 우승을 했지만 ‘뚜르’ 같은 장기전을 치르기는 기량이 부족했다. 그런대로 노르웨이 대회도 우승하고 스타급 사이클 선수가 된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졌다.

암에 걸린 것이다. 희귀한 고환암이 뇌에까지 종양이 퍼질 정도로 진행된 상태였다. 사이클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다행히 주위의 도움으로 이 분야 최고 전문의로부터 치료를 받게 됐다. 내 치료를 담당한 의사 니콜스는 회복 가능성을 50대50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3%에 불과했었노라고 훗날 털어놓았다. 암과의 투쟁은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었다. 머리에 생긴 종양은 악성이 아니라서 쉽게 제거할 수 있었지만 흔히 ‘케모’라고 불리는 항암치료는 한마디로 독물을 몸속에 주입해 암세포를 없애는 것이다. 독물은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세포까지 망가뜨린다. 너무도 독하기 때문에 1일 5시간 5일 치료받으면 2주일을 쉰 뒤 다시 치료를 계속했다. 3개월여에 걸쳐 최대한계인 4회의 치료가 끝날 무렵에는 거의 식물인간이 됐다. 독물을 중화시키기 위한 정맥주사를 3개월 동안 하루 24시간 맞아야 했는데 치료가 끝난 후 바늘이 빠지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암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완치된 후 암환자 돕기 단체설립을 추진하다가 아내 크리스틴을 만났다. 크리스틴은 나의 재기에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암 발병시점에 소속팀을 옮기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게 되는 기막힌 일이 생겼다. 모든 것을 다 팔아 병원비를 충당할 계획을 세웠는데 다행히도 한 스폰서측에서 보험을 커버해 주기로 했다.

치료가 끝난 뒤 재기에 나섰으나 기존팀중 누구도 나와 계약을 하려 하지 않았으나 새로 발족한 체신부팀이 나를 받아줘 다시 유럽으로 갔다. 그러나 처음에는 뜻대로 몸이 안따라 줬다. 어느 날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어 불쑥 텍사스로 돌아왔다. 아내는 자신의 커리어까지 포기한 채 낯선 이국 땅에서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가 났을 법도 하지만 내가 아무런 하는 일도 없이 방황하는 동안 끈질기게 기다려 주었다. 결국 나는 유럽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재기에 나섰다. 나의 목표는 ‘뚜르’에 있었다. 과거 수영으로 다져진 근육질이었던 나의 체격은 평지의 속도전에는 통했지만 ‘뚜르’ 같은 산악코스 위주의 지구전에는 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암과의 투병을 하는 동안 군살 없이 날렵한 모습으로 변했다. ‘뚜르’ 도전에 적합한 체격이 된 것이다. ‘뚜르’를 위한 훈련을 계속했다. 약점인 오르막길 코스 훈련을 몇달 동안 거듭했다. 내가 ‘뚜르’를 노린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웃었다. 그러나 나의 ‘뚜르’를 향한 집녑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3주일 동안의 험난한 여정의 대부분을 선두주자가 입는 노란 유니폼을 뺏기지 않은 채 ‘뚜르 드 프랑스’를 우승했다. 이제 미국인들도 더 이상 사이클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뚜르’에서 우승한 다음 날 나는 나이키가 보내준 자가용 비행기로 뉴욕에 와서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그 자리에는 줄리아니 시장과 도널드 트럼프도 참석했다. 데이빗 레터맨 쇼와 투나잇 쇼에도 출연했다. 고향 오스틴에서는 퍼레이드도 준비돼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아들 루크의 탄생이다. 사실 나는 암치료 과정에서 생식불능의 사내가 됐다. 그러나 치료를 받기 전 의사의 권유로 정자은행에 내 정자를 보관했었다. 덕분에 암이 완치된 뒤 인공수정을 통해 루크를 낳을 수 있었다. ‘뚜르’는 내 인생의 값진 승리지만 암으로부터의 승리만큼 값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의 승리도 나의 아들 루크만큼 소중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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