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誤報와 언론의 책임

2000-11-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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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에세이

▶ 권기준 사회부장

대영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일컫는 영국의 BBC 방송은 공정성과 신뢰성을 그 트레이드마크로 한다.

BBC 방송은 보도에 ‘투 소스 룰’(Two source rule) 원칙을 갖고 있다. 중요하고 민감한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언론매체나 자유기고가 등에 의해 확인이 될 때까지는 보도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신속한 보도를 주장하는 내부의 반발도 있지만 보도의 신뢰성을 기한다는 명제아래 지금도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로 인해 BBC 방송은 특종을 하지는 못하지만 영국 사람들은 BBC 방송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언론에서 특종은 영광이고 오보는 치욕이다. 언론은 단 한번의 오보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신속하게 보도했더라도 정확하지 않다면 보도하지 않은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의 언론 오보는 일각에서 ‘언론의 대참사’라 표현할 정도로 미 언론사에 치욕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미 언론들은 투표도 끝나기 전인 오후 4시49분(서부시간) 출구조사를 바탕으로 경합지 플로리다를 고어가 차지했다고 첫 오보를 냈다. 오후 6시55분 CNN은 고어 승리를 번복했고 밤 11시16분 FOX 뉴스를 중심으로 부시 승리가 보도됐다. 두번째 오보가 났다. 부시 리드가 8일 새벽 1시께 까지 계속됐고 결국 마감시간에 쫓긴 신문사들마저도 ‘부시 당선’이란 중대한 오보를 냈다. 새벽 1시30분께 모든 방송들은 다시 부시 승리를 번복, ‘승리를 점칠 수 없다’(Too close to call)로 선회했다.

숨막히는 박빙의 표차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방송사들이 최종 개표 결과를 보지도 않고 ‘부시 대통령 당선’을 선언한 것은 명백한 오보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선관위의 공식 발표도 보지 않고 방송만을 믿고 ‘부시 당선’을 대서특필했다. 7일 밤부터 8일 아침까지 미국과 전세계는 언론의 오보 사태로 어리둥절했다.

지금까지 기록된 미 언론 최대의 대선 관련 오보는 지난 1948년 존 듀이와 헨리 트루먼 후보 선거 때였다. 유력지 시카고 트리뷴이 개표도 끝나기 전 "듀이 승리"라고 오보를 냈다. 이로 인해 미 전역은 발칵 뒤집혔고 트리뷴지는 선거 때마다 이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이 때의 경험으로 이후 최대의 경합선거였던 이번 선거에서 트리뷴지는 "박빙 승리 점치기 어려워"(As Close As It Gets)란 제목으로 전국에서 가장 정확한 보도를 한 신문이 됐다. 트리뷴지 소유의 LA타임스도 이 시간 월스트릿 저널등 대부분의 주요 신문들이 인터넷을 통해 "부시 43대 대통령 당선"을 내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박빙"(Neck and Neck)이라고 정확히 보도했다. 본보 역시 ‘고어-부시 승부 못가려’로 보도했다.
언론이라고 완벽할 수는 없다.

속보경쟁, 마감시간, 정보부족, 기자의 편견 등으로 오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이유로 오보가 정당화 돼서는 안된다.

대선 오보 이후의 방송사와 일부 신문사의 태도가 더 당혹스럽다. 시청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던 방송사들은 오보에 대한 사과는커녕 오보방송을 특집으로 구성, 재방송까지 했다. 올랜도 센티넬지는 하루아침에 헤드라인을 4번이나 바꿔 화제가 됐고 워싱턴 포스트지 오보신문은 경매에까지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얼마전 북극에 다녀온 과학자의 말만 믿고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북극점의 빙하가 녹고 있다고 썼다가 오보임이 드러나 열흘만에 기사가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정정기사를 내보냈다. 뉴욕타임스의 용기를 보여준 것이다. 이같은 용기가 뉴욕타임스를 세계 최고 권위의 신문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CNN의 정치분석가 제프 그린필드는 "이제 가능한 한 적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이번 대선의 성급한 보도를 후회했다.

잘 못이 있을 때마다 이를 시정하려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언론은 본능적으로 신속한 보도를 원한다. 그러나 그 본능은 어디까지나 진실과 정확한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언론보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전적으로 불신하는 것도 바보스러운 일’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언론은 대선 오보의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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