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트로젠: 할 일이 없어
블라디미어: 나도 그 의견쪽으로 기울기 시작해.
이렇게 시작하는 사무엘 베케트의 명작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방랑자 블라디미어와 에스트로젠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이름이 고도인 것 같다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공허한 시간을 보낸다.
아일랜드의 세계적인 게이트 극단이 지난 26일부터 29일사이 UCLA 프로이드 플레이하우스에서 공연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53년 파리에서 초연되면서 즉석에서 클래식이 된 20세기의 대표적인 연극. 장식이라고는 바위덩어리 옆에 벌거숭이 나무 한 그루뿐인 미니멀리스트 무대에서 부조리를 벗은 채 드러나는 현대사회의 허망함, 신발에 얽매인 에스트로젠처럼 세상의 사소한 일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권태, 그리고 더 넓은 의미에서 존재의 고뇌가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나름대로의 고도를 기다리며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연관성이 침식되지 않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블라디미어와 에스트로젠이 기다리는 고도는 누구인가. 연극이 초연된 이후 늘 관객들이 머리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의문이다. 가장 흔하게는 희망으로 해석되고 더러는 죽음, 신, 또는 우리가 기다리는 모든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베케트 본인은 고도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연극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각자가 고도를 무엇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연극을 보는 견해가 달라진다.
1928년 창설된 이후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들의 리바이벌 공연, 특히 베케트 페스티벌로 유명한 게이트 극단이 미국 서부지역을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4일간의 공연 티켓이 매진되는 성황을 이뤘다. 블라디미어 역을 맡은 배리 맥거번과 에스트로젠 역의 자니 머피는 텅빈 무대를 촐랑촐랑 뛰어다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조급한 두 주인공을 능란하게 연출했으며 나머지 3개역도 수준급 배우들이 본토박이 아일랜드 액센트로 주인공들의 익살스러운 면을 포착했다.
남가주에서 좀체로 접하기 힘든 이번 공연을 보면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극장을 가득 메운 400여명의 관객가운데 일부 대학생을 제외하고는 한인은 커녕 아시안 관객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 연극을 이해하지 못할 나이 어린 자녀들도 함께 데리고 온 미국인 부모들도 눈에 띄었는데 한인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문화생활은 바쁜 이민생활에서 모르는 것을 기다리는 많은 한인들에게 마른 감정을 적셔주는 샘물일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어려서부터 문화를 접하게 하는 것이 값없는 교육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