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환자 대기실의 고어파, 부시파

2000-11-0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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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조<암전문의>

환자 치료 틈사이에 가끔 대합실에 나가서 환자와 그들의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나의 일과 중의 하나이다.

작년까지도 운전하였다는 97세의 할머니는 육신뿐 아니라 정신도 건장하셔서 오늘도 피부암 치료를 받고 있다. 72세의 딸이 운전해서 같이 오기에 딸을 가져서 행복하시겠다고 하였더니 자기도 아들 안 가지고 딸이 있는 것이 다행인 것을 안다고 한다. 노인들이 치료받으러 올 때는 미국사람들의 경우 십중팔구는 딸이나 손녀들이 모시고 오는 것을 보면서 아들을 원하는 한국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요즘 내가 흔히 나누는 대화로 “누구를 대통령으로 지지하느냐”는 질문에는 선뜻 조지 W. 부시는 그의 아버지 탓으로 투표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과는 반대의 기질이다.

55의 백인 남자는 폐암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 자신도 몇 달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날 때마다 정치얘기를 즐긴다. 그는 텍사스의 사형집행을 보면서 부시를 지지할 수 없다고 우긴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저지른 살인의 피해자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는 멋쩍어 한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한 두가지 이유로 후보자를 지지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이 보통이다.


지금 40세 전후의 백인 여자는 앨 고어 부통령에 대해서는 한사코 반대하는 분이다. 그는 인공유산 반대에 철저할 뿐 아니라 클린턴 대통령의 여자문제에 열을 올리며 분개하니 그 부통령을 지지할 리 없다. 거짓말하는 정치인은 투표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옆에 있는 가족이 합세한다. 모든 정치인은 거짓말쟁이고 위선자라고 우긴다. 가장 좋은 예로 케네디 대통령의 여자 편력을 들고나선다.

의견이 다 다른 것이 좋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바탕이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꼭 필요한 것은 그 의견들을 모아 올바른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야 되는데 그 점에서 각 분야의 사회 지도층의 역할이 필요하다. 지난 15년간 항상 금연 배지를 옷에 달고 다니는 나로서는 환자 계몽이 사회 개선의 중요한 일환으로 여기고 있다. 흡연자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금연운동은 담당의사가 환자들에게 자주 권고하는 것이라는 연구보고가 나온지 오래이지만 과연 얼마나 자주 의사들이 금연을 권고하는지 궁금하다. 아픈 환자들의 치료도 중요하지만 틈틈이 환자와 가족들의 계몽에 시간을 보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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