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깃불로 잃어버린 것들

2000-11-0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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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희<신경심리학 박사>

현대문명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역시 전기이다. 밤하늘에서 불야성을 이룬 도심지를 내려다 보면, 전깃불로 밤을 낮으로 바꾸는 기술을 터득한 인간의 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깃불로 밝힌 도서관은 밤낮의 구별이 없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낮처럼 밝힌 야구장은 조그만 공을 주고 받는 일도 어렵지 않게 한다. 호롱불 밑에서 독경수신(讀經修身)하던 일이나 어두운 등잔 밑에서 두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어 오순도순 밀담을 주고 받던 장면은 현대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옛 역사가 되어 버렸다.

사람은 낮과 밤을 번갈아가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문명은 밤의 특성을 빼앗아 가고 있다. 낮의 특성이 강한 햇빛을 통하여 넓은 시야에 널려있는 물체를 구석 구석 그리고 상세하게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밤에는 제한된 시야에서 가까이 있는 물체를 희미하나마 전체적 그리고 상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사람의 지각은 시각에 가장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망막에 투사된 영상이라 하여 다 지각하는 것은 아니다. 제한된 테두리를 만들고 그 틀안에 담긴 물체들로 구성된 하나의 통일된 지각 세계를 만든다. 예를 들어 한 마을 전체를 담은 그림이라도 어떤 초가집 위에 사각형을 그려 놓으면 우리 눈은 그 초가집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만일 수직선을 그리고 그 주위에 그림틀을 비뚤게 놓으면 그 수직선도 비뚤게 보인다. 눈으로만 비뚤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져보아도 비뚤게 느껴진다. 그림틀은 또한 그 안에 있는 물체를 개성 그대로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사과나무 전체에서 사과의 아름다운 모습을 얼른 찾아보기 힘들지만, 한 사과 위에 그림틀을 놓으면 그 사과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변한다.


그림틀이 시야와 관계성 그리고 개성을 정립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빛 또한 지각의 참조범위를 규정지어 주는 힘이 있다. 전깃불이 운동장 끝까지 볼 수 있게 한다면 호롱불은 마주앉은 사람에게만 시야를 제한해 준다. 고급식당에서 촛불로 식탁을 밝히는 것은 꾸밈새를 돋구고, 어두운 불밑에 앉은 사람의 잔주름을 가려주기 때문에 좋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작은 불이 식탁에 마주앉은 두 사람만을 그림틀로 묶어주는 무드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캠프 파이어를 하면서 전깃불을 밝혀 켜두지 않는 것은 모닥불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서로 묶어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혼자서 밝히는 촛불이라면 나와 나 즉, 자신의 내면세계까지도 보게 하여준다.

호롱불이나 모닥불을 꼭 지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작은 불빛 아래서 두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어 일찍 보지 못하였던 아름다운 인간상을 서로 찾아보고 또 자기만의 세계를 밝힌 불밑에서 자신을 스스로 살펴보는 것은 고대인이나 현대인에게 다 중요하건만 전깃불로 밝힌 밤이 이런 인생경험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감정 지능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다.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서 공부를 잘하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또 만족한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감정 혹은 정서적 성숙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컴퓨터처럼 계산하는 능력이 있다 해도 인생을 살아가는 IQ는 낮다는 것이다. 인생의 지혜는 대부분 대인관계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규정된다. 낮처럼 밝은 빛 아래서 주위의 일을 지구촌 전체의 움직임이나 인류 역사의 맥락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을 살피고 부부, 자식, 친구, 이웃과의 관계를 살피는 호롱불 지능검사도 필요하다. 그래서 인생의 하루는 낮과 밤이 번갈아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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