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은퇴의 미덕

2000-11-0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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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대

▶ 이기영<본보 뉴욕지사 주필>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에는 일과 휴식의 구분이 뚜렷하다. 하루의 생활중 출근시간부터 퇴근시간까지는 일을 하는 시간이다. 점심시간과 정해진 휴식시간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일에 매달린다. 그러나 퇴근시간이 되면 ‘땡’소리가 나게 일을 끝낸다. 다음날 근무시간이 될 때까지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시간을 만끽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습성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경험했겠지만 일과 휴식의 구분이 애매하다. 근무시간에 일과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사적인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어도 상사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눈치를 보느라고 퇴근을 못 한다. 낮에는 허송세월 하다가 툭하면 야근을 한다고 법석을 떨기도 한다. 일과 휴식이 도무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은퇴의 경우도 대조적이다. 미국인들은 평생동안 일을 하다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은퇴를 한다. 은퇴연령은 사람마다 자기의 결정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일찍 은퇴를 하고 어떤 사람은 고령의 나이에도 은퇴를 하지 않고 일을 한다. 대개 경제적으로 은퇴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는 60대에 은퇴를 하는데 현행 사회보장제도에 따르면 65세가 은퇴연령이다.


미국사람들은 은퇴를 하면 완전히 개인생활을 즐긴다. 여행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하거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즐겁게 산다. 더 이상 돈이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하여 고달픈 생활을 하지 않는다. 한국에도 정년퇴직이라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은퇴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 직업이 없어지면 그때부터 은퇴이고 일을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은퇴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미국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대통령도 임기가 끝나면 은퇴를 한다. 정치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을 지내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퇴임한 대통령들이 너무도 철저하게 은퇴하여 대중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어떤 때는 전임 대통령의 생존여부를 착각할 때도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의 경우 가끔 현실활동에 참여하지만 그것은 대통령의 연장선상에서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봉사 차원의 활동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너무 젊은 나이에 퇴임을 하게 되기 때문에 퇴임 후 하원의원에 출마할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가 하원의원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소일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하겠다고 하지만 사람은 평생 동안 일만 할 수는 없다. 사람에게는 일하고 놀고 쉬는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한데 특히 노년은 쉬는 시기이다. 은퇴는 이처럼 개인의 생애에서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은퇴를 통하여 세대의 교체와 시대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들은 은퇴를 모르는 불사조를 꿈꾸는 것 같다. 대통령을 그만둘 수밖에 없어서 그만 두기는 하지만 퇴임 후에도 계속 권력을 갖고 싶어하니 말이다. 대통령 임기 말에 항상 개헌문제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이원집정제 등 괴상한 발상이 있는가 하면 후계구도 운운하는 것들이 모두 그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을 지낸 YS의 최근 행보는 은퇴를 모르는 권력병 환자의 처량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문민독재란 말을 들을 정도로 권력을 누렸던 그가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제 또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제 임기 후반에 있다. DJ는 여러 면에서 YS와 흡사하다는 말을 듣고 있다. 민주화 투쟁 경력이나 권력지향적 성격이 그러했고 대통령 욕심도 그러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권력의 정상이고 대통령을 퇴임하면 그 정상에서 내려와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또 한 대통령의 은퇴 모습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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