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만족(滿足)과 자족(自足)

2000-11-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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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주(수필가)

“가을은 고독한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계절이다.”

시인 김형영의 ‘가을은’의 마지막 구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는 아름다움이 손끝에 만져지는 듯하다.

지난 주만 해도 눈이 부시게 찬란했던 단풍이 어제 내린 비 탓인가. 안타깝게도 하루 사이에 벌써 그 찬연함이 퇴색해졌다. 그것은 생명과 결별하는 슬픔의 색깔. 그러나 그 날을 떠올리면 다시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의 머리 위에 부드럽게 손을 얹은 가을의 은총을 감지했던 날이기에.


얼마 전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고, 그냥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도 나눠 먹고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어서였다. 가을만 되면 영락없이 찾아오는 무기력감이며 우울함을 털어내고 싶은 기대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갖기 위한 모임이니만큼 초청자 인선이 가장 어려웠다. 그냥 내가 외롭고 힘들 때 위로가 되어주었던 친구들을 불러야겠다, 생각하고 이름을 적어보니 금새 20명 가량이 됐다. 평범한 가정주부에서부터 신앙인, 사업가, 공무원, 학생, 전문직 종사자, 예술인까지. 이 다양한 사람들을 어떻게 함께 잘 어울리게 할 수 있을까?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아무튼 걱정은 뒤로 미루고 음식 장만을 시작했다. 딸애들은 빈대떡을 부쳐가며 먹어가며 까르르르 웃음꽃이 그칠 새가 없다.

지금껏 내가 고집스레 지켜온 원칙 중 하나는 “우리집 손님에겐 반드시 내가 만든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이다. 바쁜 이민생활 탓이긴 하지만, 집집마다 음식을 주문해다가 대소사를 치르는 이 곳 생활은 어느 집에 가든 똑같은 음식이 차려져 있어 젓가락을 대기도 싫어질 때가 많았다. 나중에 후배 한 사람이 “난 미국 와서 홈메이드 음식만으로 파티하는 집은 오늘 처음이야”라고 말하는데, 코끝이 찡했다. 그만큼 우리네 삶이 고달픈 것일까. 아니면 각박해진 것일까.

파티는 대성공이었다. 음식도 유난히 맛있게 잘 되었다. 먹을거리가 좋으면 파티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배가 흡족하면 사람들 마음도 넉넉해지니까.

우리들은 기타에 맞춰 동요를 불렀다. 사람들마다의 눈 속에 향수가 고여갔다. 그 다음은 1950년, 60년대의 팝송들, 그리고 70년대 통기타 시대까지 두루 섭렵해갔다.

온몸에 짜르르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를 가진 친구의 노래는 우리 모두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함께 노래 부르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묘한 감동이 있었다. 통기타 음률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산과 구름과 바다를 유영했다.

직업도 다르고, 지위도 다르고, 교육 수준도 다르고, 전혀 공통점 없는 사람들이-아니 내 친구라는 공통점은 있다- 모이니까 그 곳엔 대립도 없고, 질투도 없고, 시기나 분열은 더더욱 없었다. 모두들 일상의 허위와 가식을 벗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벗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딸들이 내게 말했다. “엄마 친구들, 모두 참 좋은 분들이야. 그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는 엄마는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이젠 우울해하거나 외로워하지 마세요.”

그래.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만족(滿足)이 아니라 자족(自足)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족은 체념 끝에 얻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아름다운 영혼과 만나는 기쁨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감사하다. 올 가을은 더 이상 내게 우울함은 없으리라. 진실로 풍요해질 수 있는 삶의 비밀을 발견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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