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장기 호황 속의 파산 행렬

2000-09-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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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코노미스트

▶ 민경훈 (편집위원)

찰스 디킨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상을 누구보다 정확히 묘사한 영국의 문호다. ‘데이빗 카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롤’등 한인들에게도 친숙한 그의 작품은 책뿐만 아니라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고아와 감옥등 사회의 어두운 구석이 자주 등장한다. 평론가들은 그가 7살 때 아버지가 감옥에 가는 바람에 어렸을 때부터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던 경험이 그의 삶에 평생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디킨스의 아버지가 감옥에 간 것은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었다. 월급쟁이로 과소비를 하는 바람에 빚을 갚지 못해 잡혀간 것이다. 지금은 살인 강도를 저지른 사람이 가는 곳이 감옥이지만 19세기 이전까지 감옥에 갇히는 사람은 주로 돈을 제 때 갚지 못했거나 범죄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유죄판결이 난 후에는 처형당하거나 유배지로 보내지거나 태형에 처해지거나 노예로 팔려 가는 게 보통이었다.


돈이 없어 빚을 못 갚는 사람을 범죄자와 똑같이 취급하지 않게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부터다. 비즈니스에는 항상 실패할 위험이 따르게 마련인데 사업을 하다 망했다는 이유로 잡아넣어 가지고는 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는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한국을 비롯해 자본주의 역사가 짧은 나라에서는 아직도 부도를 내면 형사범으로 취급돼 감옥에 간다.

파산에 대해 가장 관대한 나라는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이다. 1978년 제정된 현행 파산법은 파산 신청을 어느 나라보다 쉽게 하고 있다. 개인의 경우 챕터 7을 부르면 크레딧카드 등 담보가 없는 빚은 면제받을 수 있다. 파산 통계를 살펴보면 경기가 나쁘다고 꼭 파산이 느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미국이 오랜 불황에 시달리던 70년대와 80년대 초에는 파산을 신청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개인파산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 것은 경기가 좋던 85년부터였다. 불황이 한창이던 90년 연 70만건 정도이던 개인파산은 92~93년에는 오히려 줄었다가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하던 98년에는 140만건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작년에는 120만건을 기록했지만 96년이래 100만건 이하로 내려가 본적이 없다.

역설적이지만 미국의 긴 호황이 파산을 부추기고 있다. 비즈니스가 잘 되자 씀씀이를 버는 것 이상으로 늘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미국인들은 수입 증가분보다 2배 이상 더 쓰고 있으며 저축률은 지난 7월 -0.2%로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파산을 신청하는 사람은 더 이상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해야 하는 가난뱅이가 아니다. 엘리자벳 워런 하버드 대학교수등 3명이 공동 집필한 ‘위기의 중산층: 빚더미 속의 미국인’이란 책에 따르면 최근 파산을 신청한 미국인 가운데는 의사, 변호사, 회계사, 엔지니어등 전문직 종사자가 잔뜩 들어 있다. 개인 파산 신청자 중에는 연수 30만달러의 산부인과 의사, 45만달러짜리 공인회계 법인 파트너등 고소득자가 즐비하다. 70만달러가 넘는 집에서 살며 벤츠와 인피니티등 고급차를 타고 다니지만 무분별한 지출로 빚을 지고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두 손을 들고 만다는 것이다.

90년초 이후 계속 줄던 한인들의 파산도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고 있다. 한 파산 전문 변호사는 “작년까지 뜸하던 한인 파산이 올 들어 늘고 있다”
며 “다운타운 자바 업계에서만 1년 사이 60여명이 손을 들었다”고 말했다. 다운타운의 경기도 경기지만 부동산 가치 상승과 과도한 크레딧카드 빚이 한인 파산의 더 큰 요인이다. 부동산 값이 오르자 2차 융자를 받아 에퀴티를 빼 쓴 후 이를 감당하지 못해 만세를 부르는 것이다. 요즘은 크레딧카드 빚을 수만달러씩 쌓아 놓고 정기적으로 파산을 하는 얌체족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파산 비용은 1,000달러 정도니까 돈만 따지면 이익이다.

이처럼 파산법을 악용하는 사례가 늘자 연방의회는 올 초 파산 요건을 엄격하게 하는 새 법을 통과시켰으나 경제적 약자들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클린턴 대통령 부부 등이 반대의사를 밝히고 있어 시행 여부조차 불투명한 형편이다.

전문가들은 “장기 호황으로 미국인들이 자신의 수입과 경제 형편에 대해 지나친 낙관에 빠져 있다”며 낙관을 뒷받침해 주는 부동산과 주가가 하락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상승세를 멈추기만 해도 곤경에 빠지는 사람이 급증할 것으로 우려했다. 자신의 현 씀씀이가 분수에 맞는지 한인들도 한번쯤 돌아볼 때다.

kyungmi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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