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통령직은 축복인가 불행인가

2000-09-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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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 이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1998년 현직 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가 대선 승리 후 처음 가진 공식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1836년 마틴 밴 뷰렌이 현직 부통령으로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무려 152년만에 자신이 처음 현직 부통령으로서 대선에 승리한 데 대한 남다른 감회에서 나온 것이다.

전후, 그러니까 해리 트루먼 대통령부터 따져 현대의 미국 대통령은 모두 10명이다. 이중 절반이 부통령 출신이다. 트루먼, 닉슨, 존슨, 포드, 그리고 부시가 바로 부통령 출신. 이같이 현대 미 대통령중 절반이 부통령 출신이라는 사실은 미국 정치에서 부통령의 정치적 위상이 그만큼 높고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 미국 대통령 선거 때마다 정치판 안팎에서는 이런 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부통령직은 저주 받은 자리인가, 축복 받은 자리인가’-. 앞서도 지적됐듯이 현직 부통령이 대권 후보가 돼 본선서 승리한 경우는 ‘한 세기에 한번’ 밖에 없을 정도의 진기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통령 자리는 본래 정치적 위상이 아주 희미한 자리였다. 1787년 미헌법 제정회의는 부통령직을 정치적 파워는 거의 없는 명예직에 불과한 자리로 제정했다. 부통령에게는 상원의장직이 주어졌으나 표결권도 없고 단지 가부 동석일 경우에만 표를 행사할 권한만 주었다. 또 당시는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해 부통령은 2위로 패배한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돼 있었다.


정당간에 정·부통령 티켓이 확정돼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본격적 정당정치가 시작된 후부터다. 부통령 후보는 그러나 당시도 여전히 ‘찬밥’신세였다. 1인자 대통령에 가려 아무도 관심을 안 갖는 자리였던 것이다. "죽기도 전에 매장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대니얼 웹스터가 1848년 휘그당 부통령 후보지명 제의가 들어오자 내뱉은 말이다.
부통령의 중요성이 새삼 인식되고 그 위상도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트루먼 대통령 시절부터다. 1945년 2차대전 종전을 바로 앞두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부통령인 트루먼은 원폭 계획이 있다는 것도 잘 모를 정도로 정보에서 차단돼 있었다. 이를 계기로 부통령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 1948년 대선부터는 대통령 후보에 버금가는 자질을 부통령 후보에게 요구하는 등 정치인으로서, 또 행정부 내 제2인자로서 부통령의 위상이 높아졌다.

오늘날 미국의 부통령은 집권당의 확고한 ‘크라운 프린스’다. 부통령에게도 따로 예산을 배정, 보좌관을 두고 있다. 모든 국가 기밀을 브리핑 받는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철저한 지도자 훈련을 받는 자리가 부통령 자리다. 또 현직 대통령이 임기가 차 물러나면 이변이 없는 한 당권은 부통령에게 돌아가고 부통령이 결국은 대선 후보 지명권을 따내는 게 상례화 돼 있다.

’준비된 지도자’로 훈련을 쌓고 또 지명도도 높다는 정치적 이점에도 불구, 현직 부통령 대통령 후보가 곧바로 백악관에 입성하는 데에는 그러나 만만치 않은 장애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해서 나온 말이 ‘밴 뷰렌 신드럼’이다. 밴 뷰렌에서 부시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34명의 부통령중 대권도전에 나선 부통령은 고작 7명이다. 이중 그나마 선전 끝에 간발의 차이로 대선서 패배한 사람은 1960년의 닉슨과 1968년의 험프리 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부통령직이 안고 있는 특수성 때문이다. 부통령은 정치적으로 대통령을 보호하고 때에 따라서는 대통령 옹호의 최선봉에 나서야 한다.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 스캔들로 난경에 처했을 때 고어가 나서 "클린턴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게 그 예. 이는 대통령과 민주당에게는 고무적 발언이지만 고어에게는 분명히 정치적 악재다.

또 모든 공로는 대통령에게 돌리고 실책은 뒤집어 써야 하는 현직 부통령으로서 대통령 후보가 지니는 특성 역시 정치적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 있다. 올 선거의 경우 최장의 경기 호황은 ‘클린턴 행정부’의 공로로 인정되면서 클린턴 스캔들의 부담은 고어가 지게 된 것이다. 좋은 정책을 제시해도 악재가 될 수 있다. 왜 대통령을 도와 진작 그같이 좋은 정책을 제시 않았는가 하는, 말하자면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도 있는 것이다.
부통령은 대통령에게 절대 충성하고 나서지 않아야 한다는 철칙도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 이같은 근무자세에 충실한 부통령에게 따라붙는 비판은 리더십이 없다는 게 되기 십상이다. 1988년 선거시 조지 부시에게 쏟아진 비판이고 올해의 경우 고어가 이같은 비판에 시달려 왔다.

현직 부통령이 대통령 후보가 됐을 때 가장 골치 아픈 정치적 난제는 현직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이다. ‘1인자와 2인자’ 간의 묘한 역학관계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잘 소화해 내는가가 선거 승리의 요체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밴 뷰렌과 부시가 곧바로 백악관에 입성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주 요인으로 꼽히는 게 바로 ‘1인자 대통령과 좋은 관계’다. 밴 뷰렌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하에 대통령이 된 전형적 예다. 당시 잭슨은 자신의 부통령인 밴 뷰렌이 대통령이 되는 게 바로 자신의 정책을 계승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부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레이건은 자신의 행정부를 ‘레이건-부시 행정부’로 부르면서 레이건 혁명의 승계자로 부시를 적극 지원했다.

닉슨과 험프리는 반대의 케이스다. 1960년 아이젠하워의 인기는 여전히 높아 그의 공개적 지지 발언을 닉슨 진영은 못내 기대했으나 끝내 하지 않았다. 68년 험프리는 ‘괴씸죄’로 존슨의 미움을 사 패퇴한 케이스다. 부통령 입장에서 험프리는 존슨의 월남전 확전을 옹호하다가 계속 지지율이 낮아지자 이를 비판하고 나섰고 존슨은 앙심을 품게 된 것이다.

현직 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서 지니고 있는 이같은 핸디캡이 모두 극복돼도 여전히 난제는 남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자기의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2인자에서 1인자로 변신하는 탈바꿈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그 탈바꿈이 그러나 결코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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