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2000-09-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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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삶

▶ 이영주<수필가>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과 도전의식이 물론 그 첫째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묘미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 사이의 정에 잘 빠지는 나는 그런 성벽 때문에 본의 아니게 복잡한 일에 휘말리기도 하고 상처받는 일도 적지 않지만, 그런 시행착오의 반복조차 나는 사랑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참모습일 테니까.

샌디에고에서 만난 순나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곳 주류사회에서 오페라 재단이사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본인 자신은 한창 관심을 끌고 있는 화가였다. 나를 점심식사에 초대했던 날도 그림 한 점이 팔렸다면서 행복해 하는 표정이 보기 좋았다.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에 차려진 식탁 또한 솜씨와 모양새가 보통이 아니었다. 까만 접시와 빨간 젓가락도 조화로웠고, 음식들은 식탁 위의 향기로운 난과 더불어 한폭의 유화 같았다. 미국에 온지 20년이 되었지만 순나처럼 멋스럽고 맛있는 손님 접대는 처음이었다. 그런 분위기와 멋과 맛은 지극한 정성 없이는 만들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당의 딸이라고 고백할 때도 너무 담담하게 얘기해서 듣는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무덤덤하게 들었다. 남의 개인사를 새삼스럽게 들춰내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순나에게 감동받은 점은, 그런 출생의 아픔과 온갖 역경을 거치고 오늘에 이른 그녀의 의지와 노력이다.

그녀의 정원엔 400그루의 장미가 자라고 있어서 차가 마당으로 들어갈 때 장미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정원을 자신이 직접 손질한다고 했다. 새벽에 일어나 장미 돌보고, 그림을 그리고, 스위스인 남편의 도시락은 물론 구두를 닦아주고, 와이셔츠까지 풀먹여 다려준다. 사람들은 갈고리 같은 내 손을 보면서 놀라곤 하는데, 그녀의 손을 보면서 나는 내 거친 손에 대해 조금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노동자처럼 억센 우리 두 사람의 손 때문에 우리는 더욱 서로에게 끌렸나보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학교 친구 경조는 또 다른 의미에서 나를 감동시켰다. 그녀의 집에 갔을 때 내 눈을 끈 것은 현관 앞에 놓여 있는, 제비 똥이 마치 설치미술 작품처럼 쌓여 있는 신문지였다. 현관 위 양쪽에 제비집이 두 개 있었다. 한쪽에는 새끼들이 주둥이를 내밀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비어 있었다. 어미 새와 아빠 새가 양식을 구하러 나간 것이다.

마당에 작은 계곡과 물레방아를 만들어 놓았고, 나무 밑 그늘에는 편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경조는 그 의자에 앉아 새벽 한시까지 별을 바라보곤 한다고 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신새벽 밤하늘의 별을 헤는 경조의 감성.
“작년엔 말이야, 제비 두마리가 동료들과 함께 떠나지 못하고 남았어. 걱정이 돼서 매일 밖에 나가 올려다보면서 ‘너희들 따뜻한 나라에 못 가서 어쩌니? 추우면 집에 들어와라.’ 하고 현관문을 열어 놓곤 했지. 맨날 그러니까 한번은 정말 리빙룸으로 날아 들어오더니 한 바퀴 돌고 나가더라.”
해마다 그 제비의 후손들이 자기 집을 찾아온다고 믿는 경조는 내게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잠언시집을 선물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했으리라……”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 시를 읽으며 나는 순나를 생각하고 경조를 생각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참으로 여러 가지다.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극복해 가는 과정도 각양각색이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반추해 본다. 이틀 전부터 유난히 하늘이 높고 푸르다. 또다른 여행 생각에 가슴이 떨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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