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구촌 행사인가 ‘NBC의 올림픽’인가

2000-09-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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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세철 (논설위원)

"광적인 스포츠 열기와 오직 돈만을 추구하는 커머셜리즘이 결합을 이루었다. 그 결과 엄청난 변화가 따랐다. 그 변화는 그러나 긍정적이기보다는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새 천년을 맞아 영국의 한 전문지가 현대의 스포츠를 주제로 내건 거대담론 끝에 내린 총체적 결론이다.

내로라하는 논객들을 동원해 마련된 이 대특집은 이같은 결론과 함께 현대 스포츠의 병폐를 여러 각도에서 지적하고 있다. ‘교사, 부모등 전통적 롤 모델을 제치고 돈과 명예를 거머쥔 스포츠 스타들이 청소년의 우상이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도덕률 해이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스포츠는 권의주의형 체제 국가에서 독재자를 떠받드는 도구로 전락했다’ 등등.

스포츠 병폐론의 핵심은 지나칠 정도로 ‘돈에 오염됐다’는 데로 좁혀진다. 올림픽 경기도 예외가 아니다.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TV 중계권이 그 병폐의 실례. 그러다 보니 올림픽 경기에서도 오직 돈이 말해 주게 됐고, 올림픽은 아마추어 정신의 실종과 함께 내셔널리즘의 각축장이 됐다는 지적이다.


세태가 세태인 만큼 올림픽 경기가 열린다 하면 관심은 온통 메달에 쏠리는 추세다. "애국적 미국민들은 아주 마음을 턱 놓아도 좋을 것이다. 또 ‘미국이야말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완전무결한 국가’임을 선포해 온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새삼 확인, 득의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왜냐고. 미국은 이번 올림픽에서 총 888개 메달중 97개를 따내 최다 메달획득 국가로 우뚝 서서 다시 한번 전 세계에 미국의 물질적, 도덕적 우위를 과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 ‘95%의 적중률’을 자랑한다는 새로운 메달획득 예측 포뮬러를 소개하면서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가 쓴 글의 서두다.

다트머스대학과 예일대 교수가 공동으로 개발했다는 이 포뮬러는 다름 아닌 ‘국력이 체력’(체력이 국력이던가?)이라는 진부한 슬로건을 계량화 해 입증한 것이다. 한 나라의 국민 총생산과 지난 40년간의 올림픽 성적을 토대로 계산을 하면 메달획득 근사 예상치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 방식으로 계산을 하니까 시드니에서도 미국이 최다 메달획득국이 된다는 이야기다.

풍자성 예언이지만 이 예언은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올림픽 개막 첫날부터 미국은 메달획득 1위를 달리고 있다. 무려 7억여달러의 올림픽 중계료를 지불한 NBC 방송의 TV화면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보이느니 오직 ‘아메리카’뿐이고 근 200에 이른다는 다른 올림픽 참가국가들은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NBC가 비싼 중계료를 지불한 것은 안다. 그러나 펜싱, 유도등 종목에 그처럼 관심이 없다면 차라리 일부 종목은 다른 방송에게 중계권을 양보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넘어진 미국 체조선수를 그처럼 오래 비추기보다는 세계 최정상 수준의 중국 선수의 기예를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NBC의 올림픽 경기중계 방영과 관련해 쏟아지고 있는 불만들이다.

"34초마다 재삼재사 일깨워주는 바는 이번 올림픽은 ‘세계인이 참가하는 지구촌 행사가 아니고 NBC의 올림픽’이라는 점이다. NBC TV화면을 통해 보이는 것은 체조선수, 수영선수, 셀러브리티들 뿐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들 대부분은 미국인이다." 워싱턴 포스트가 보다 못해 일갈한 것이다. 이같은 온갖 비난에도 불구, NBC는 ‘아메리카 일색’의 올림픽 중계 방영을 고집하고 있다. 왜?

대중매체라는 것은 사회저변에 흐르는 기류에 민감한 법이다. 대중의 정서와 동떨어진, 대중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대중매체란 존재할 수 없다. 그 경우는 이미 대중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볼 때 NBC 방송의 올림픽 중계 방향은 미국사회 저변에 흐르고 있는 기류를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 기류는 다름 아닌 ‘아메리카 넘버 1’ , 즉 미국지상주의를 표방한 내셔널리즘이다.

내셔널리즘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긍정과 부정 양면의 얼굴이다. 부정적 얼굴의 내셔널리즘은 배타적 성격을 띤다. 이 배타적 내셔널리즘이 팽배할 때 이민그룹등 미국사회의 마이너리티들은 박해를 받았다. ‘리원허 사건’으로 상징되는 ‘아시아계 때리기’의 여진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가운데 대중매체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미국적 내셔널리즘. 생각해 볼 문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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