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토론의 명수 고어

2000-09-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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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어는 토론의 명수다. 클린턴 집권초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비준을 앞두고 찬반여론이 팽팽히 맞선 적이 있다. 이 때 고어는 그 반대에 앞장선 페로와 토론을 벌여 페로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나프타는 무난히 통과됐으며 페로는 이때 잃어버린 위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96년 부통령 후보간 토론에서 공화당의 켐프는 고어에게 넉아웃되고 말았으며 올해 대통령 예선에서 라이벌 브래들리도 토론에서 나가 떨어졌다. 결국은 고어측 요청을 받아 들였지만 처음 부시가 이리저리 토론횟수를 줄여 보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고어와 부시는 둘다 명문 출신으로 명문 예일대학을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우등생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사람이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살펴 보면 책에 대한 두사람의 태도는 천양지판이다.

고어는 고등학교 때부터 수재였을뿐 아니라 예일에 입학해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고어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을 들어 보라는 질문을 받자 ‘과학 혁명의 구조’를 쓴 토마스 쿤, ‘인식현상학’의 저자 메를로-퐁티, 현상학의 개척자 후설을 들었다. 부시가 예수라고 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고어가 학생시절 그를 지도했던 한 예일대 교수는 “학교 분위기가 데모와 마약에 휩쓸려 다른 학생들이 공부를 등한시할 때도 고어는 세심히 강좌와 교수를 골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어는 그 때부터 군축과 환경문제를 연구했으며 심리학의 대가 에릭 에릭슨, 미대통령사 전문가 리처드 뉴스타트등 명교수의 강의를 찾아 다니며 대통령으로서의 수업을 쌓았다는 것이다. 고어의 막강한 토론 실력은 이때 배양된 것이다.

반면 LA타임스나 뉴욕타임스등 미 언론이 파헤친 부시의 학창시절 기사에 따르면 부시는 건성으로 대학을 다닌 학생이었다. 지금도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부시는 고등학교 다닐 때 한번도 우등을 한 적이 없다. 아버지 덕이 아니었더라면 예일대에 갈수 없었을 것이라는 건 지지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학교시절 공부를 잘 했다고 훌륭한 대통령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20세기 미 대통령중 최고의 교육을 받은 것으로 꼽히는 프린스턴 총장 출신의 윌슨과 스탠포드를 나온 후버는 모두 실패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하버드를 놀면서 다닌 프랭클린 루즈벨트나 공부하고는 처음부터 인연이 없었던 레이건은 가장 성공적인 정치인에 속한다. 어쨌든 두 사람의 면면을 살펴 보면 어째서 미국 지식인들이 부시보다 고어를 좋아하는지가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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