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상실의 계절

2000-09-1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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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 권정희 편집위원

“잘못하다가는 우울증에 걸리겠어요. 정말이지, 오른팔이 떨어져나간 느낌이에요”
어바인에 사는 한 주부가 며칠전 신문사로 전화를 해왔다. 한달여 전 아들을 동부의 사립대학으로 보낸 그는 아들 떠난 빈자리가 이렇게 클줄 몰랐다고 말했다.

“평소 아이에게 남달리 집착하진 않았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허전한 걸 보면 자식이란 존재가 여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가 봐요”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대학으로 자녀를 떠나보낸 엄마들이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다. ‘빈둥지 증후군’의 계절이다. 둥지 속 내 품안에 있던 자식이 어느날 성년이 되었다며 ‘푸르륵’ 날아가버리고 나면 뒤에 남은 부모에게 텅빈 둥지의 적막감은 한동안 견디기 어렵다. 자식을 아예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과 단순히 곁에 없다는 사실로 인한 슬픔이 아버지라고 예외일수 없지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대개 어머니를 따라오지 못한다. 품에 많이 품었을수록 아픔도 크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겪는 상실감은 어떤 형태일까. 몇년전 딸을 북가주의 대학으로 보낸 한 주부는 당시 자신의 상태를 ‘심한 우울증’으로 진단했다.
“밥은 먹었나, 늦잠 자느라 수업을 못가는 건 아닌가, 어디 아픈데는 없을까… 생각이 온통 아이한테 가있어서 내 생활을 할수가 없었어요. 우울증이 6개월쯤 계속되는 데 이러다가는 내가 못살겠다 싶더군요. 그러던 어느 순간 ‘그 아이의 삶은 결국 그 아이가 사는 것’이란 사실이 깨달아지면서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감정상태가 “연애하다 헤어졌을 때 같더라”는 주부도 있다.
“우리집이 중고등학교 바로 앞집이에요. 아침저녁으로 아들 어렸을 때 비슷한 얼굴들이 지나가는 데 그 아이들 볼때마다 가슴이 ‘찡-’ 하고 아파오는 거예요. 실연 당했을 때 아픔 같은 게 꽤 오래 갔어요”
신문사로 전화한 어바인의 주부는 ‘무기력증’을 말했다. “아들이 떠나는구나”하는 생각이 충격처럼 닥친 것은 지난봄 아들이 입학할 대학을 같이 방문하고 나서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어요. 하루종일 꼼짝도 못하고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어요”
엄마들의 ‘빈둥지 증후군’은 상당부분 정체성의 혼란과 상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이 대학에 가는 나이면 여성들은 평생의 절반, 햇수로 20년 정도를‘엄마’로 살고난 후가 된다. ‘엄마’가 아니었을 때의 자신은 기억에도 희미하다. 그런데 어느날 아이들이 떠나면 갑자기‘엄마노릇’이 끝난 것 같고, ‘엄마’를 빼고난 자신은 허깨비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시기적으로 갱년기와 맞물리면서 인생에 대한 회의나 허탈감으로 확대되기도 하는데 이를 자극하는 것이‘날아갈듯 신나는 아이들’이다.

지난해 한 여성은 딸을 타주의 대학에 데려다 주러 ‘가면서 울고 오면서 울어’눈이 퉁퉁 부었다.
“갈때는‘어린 걸 어떻게 두고 오나, 혼자 살수 있을까’ 걱정이 돼서 울었어요. 그런데 막상 학교에 도착하니 딸은 남자친구를 보자 우리한테 섭섭한 표정 하나없이 ‘Bye!’하곤 가버리는 거예요. 올때는 원통해서 엉엉 울었지요”

대학에 간 그날부터 당장 어른이 된듯, 날개라도 단듯 독립적으로 행동하려 드는 아이들의 태도는 엄마들의 상실감을 깊게하는 또 다른 요인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항구적으로 줄수 있는 것은 두가지라고 한다. 뿌리와 날개다. 품에 품은 동안 뿌리를 튼튼히 내리게 해주고 때가 차면 날개달아 날려 보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자녀가 대학에 입학해서 신나게 자기 삶을 산다는 것은 부모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마쳤다는 말이 된다. 미성년 자녀 부모역할은 막을 내리고‘빛나는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섭섭한 건 잠깐이에요. 이 시간, 이 공간이 다 내것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자유롭고 좋을 수가 없어요”라는 선배엄마들의 말은 사실이다.‘빈둥지’에 남았을 때 나이가 50이면 남은 생애가 보통 32년이라고 한다. ‘엄마’아닌 ‘나’로 재미있고 알차게 살아볼만한 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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