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리원허의 석방과 아시안 인종차별

2000-09-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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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

간첩혐의로 체포돼 지난 9개월 동안 미국을 시끄럽게 했던 중국계 물리학자 리원허가 13일 석방됐다. 처음에 무려 59개 혐의로 기소돼 종신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여 있던 리씨가 그중 가장 가벼운 정부 문서 관리 소홀 부분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죄로 풀려난 것은 연방 법무부가 처음부터 이 문제를 지나치게 부풀려 온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연방 검찰은 최근까지 “리씨가 국가안보를 저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보석은 불가하다”고 주장해 왔으나 이번 재판전 합의로 지금까지 복역한 기간을 형량에서 빼주기로 해 리씨는 아예 감옥에 갈 필요가 없게 됐다. 재판을 주재한 제임스 파커 연방지법 판사는 선고 직후 “미국 정부로부터 구금 등 불공정한 처우를 받은 것에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는데 판사가 피고에게 사과까지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번 사건을 보는 미국 언론의 태도는 극히 비판적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을 통해 “이번 재판전 합의는 정부측의 충격적인 패배며 처음부터 리씨의 죄를 과대포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리씨 사건은 처음부터 그가 아시안이기 때문에 지나친 벌을 받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중국에 군사기밀을 누출시켰다는 공화당의 공격을 받고 있던 클린턴 행정부가 대만 출신인 리씨에게 온갖 혐의를 덮어 씌워 궁지를 모면해 보려 했다는 것이다. 아시안 과학자들에 대한 차별은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국가 기밀과 관련된 핵물리학 쪽은 말할 것도 없고 기타 분야도 아시안의 고위직 승진을 막는 유리천장이 있다는게 그 분야 종사자들의 얘기다. 리씨처럼 외국에서 귀화한 케이스는 물론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들도 차별을 피할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의 30~50%는 외국 태생이다. 이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계속돼 이들이 미국을 떠날 경우 미국은 하이텍 분야에서의 우위를 잃는 것은 물론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전국 과학 아카데미등 관계자들은 다시는 이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리씨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 관계자들의 문책과 클린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리씨처럼 박사학위를 받고 첨단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지도급 인사도 아시안이란 이유로 차별을 당했다면 평범한 시민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리원허 케이스는 미국에 사는 한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늦출수 없음 새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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