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순 <계명대부설 아카데미아 코리아나 소장>
슬픔을 삭이지 못해 쌓아두면 분노가 된다. 분노는 폭력적이 되어 남을 저주하게 되고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러나 슬픔이 잘 익은 술처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따뜻한 내음을 품은 채 삭으면, 그것은 비극이 된다. 두고두고 되새기며 가슴 깊은 곳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교훈을 그곳에서 얻을 수가 있다.
몇년 전 아직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린 듯한 추운 날에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방문하고 며칠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유대인들이 남긴 신발, 옷, 빗, 안경, 금잇빨, 머리카락들이 그대로 남아 몇개의 창고를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나의 작은 믿음은 산산히 깨어지고 이제 이 믿을 수 없는 비극은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박물관은 "인류가 저지른 인종주의와 독재,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 그리고 전쟁을 경고하노라"는 팻말을 입구에 붙여 두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가해자였던 독일의 전 수상 빌리 브란트가 눈 쌓인 겨울날에 그 영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사죄하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20여년 전 온세계를 숙연케 했던 이 사진 한 장은 브란트가 나중에 동방정책을 추진하는데 큰 신뢰를 얻게 했다.
오사까 국제평화센터를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일년 뒤이다. 전시관 입구에 걸린 태평양전쟁에 대한 설명문은 참으로 간단했다. "1929년에 일어난 세계 대공황 때문에 일본의 경제는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위기를 피해 국민들의 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하여 일본은 대륙진출을 도모했다." 전시실 한쪽구석에 자리잡은 조선 코너의 설명은 더욱 간단했다. "강제연행, 강제노동, 그리고 종군 위안부문제 등 앞으로 해명해야할 문제가 산적되어 있다"라는 한마디가 전부였다.
지요다 나쯔미쯔가 쓴 ‘통곡! 종군위안부’라는 책에 의하면, 정신대에 조선 처녀들이 대거 동원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소데츠오라는 군의의 ‘화류병과 위안부에 관한 의견서’가 결정적인 방침이 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쟁터에 투입되는 창부는 나이가 젊으며 매음행위에 경험이 적고 성병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일본인 위안부의 대부분은 이미 매음행위를 경험한 여성들인데 비해 조선여성의 대부분은 젊고 초심자이다" 나쯔미쯔는 또한 어린 학도병의 말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제1선 부대에 여자들이 끌려왔다. 1개 소대에 12-13명씩 배속되어 소위 ‘천황의 하사품’으로서 굶주린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날이 새면 또 다른 부대로 옮겨져서 똑같은 굴욕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치욕을 참을 수 없었던 사람은 자살하였고 필리핀 사이판 등지에서는 전쟁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유대인 학살은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만의 슬픔이 아니라 인류의 ‘비극’이 되었다. 피해자가 슬픔과 분노를 삭이고 삭인 끝에 탄생시켜 낸 비극 작품인 것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한덩이가 되어 통곡하며 다시는 이 같은 바보짓을 하지 말자고 통한의 반성을 촉구하는 불후의 명작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 정신대!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반세기가 지나도록 배상은커녕 사죄조차 꺼리는 일본. 민족의 수난에는 눈을 감은 채 굴욕적인 대일 관계를 유지해온 우리 정권 담당자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는 정신대 문제를 역사의 사생아로 묻어 두는 한 그것은 치욕스런 슬픔이요 절망스런 분노일 수밖에 없다. 정신대 국제법정 기금모금 음악회가 다음주 LA에서 열린다. ‘비극’의 무대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