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얼굴 없는 미인

2000-09-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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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지못할 일

▶ 윤봉춘<페어필드>

언젠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한 법률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사건 개요를 설명하고 관련서류를 팩스로 보내고 일차 면담 날짜를 기다리는데 전화가 왔다.

자기가 보기에는 사건의 내용이 법정까지 가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으니 상대방과 협상을 통하여 어느 선에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를 주기에 변호사께서 수고를 하여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수임료를 물어보니 머뭇거리고 망설이다가 그냥 거저 일을 처리하여 주겠으니 다음 서류나 보내라고 한다.

참으로 의외의 답변을 듣고서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와는 처음인데 무료로 사무처리를 해 주겠다니...


그래도 나의 도리상 무료봉사를 받을 생각이 아니니 관례대로 변호사 비용을 지불하겠으니 액수를 알려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더니 그녀는 웃으면서 상대쪽에서 1만달러 미만을 클레임하여 왔는데 우리 법률회사는 이런 상해사건은 최저 계약금 수임료가 1만달러이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인데 그래도 부탁을 하겠습니까 내가 보기엔 큰 사건이 아니니 차라리 제가 무료로 처리하여 드리겠습니다 한다.

이곳에서야 해당되는 말이 아니겠지만 한국에서 변호사는 허가난 XX이라고 하던 속된 말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이곳 타국땅, 메마른 이민사회에서는 1세, 1.5세, 나아가 2세들의 전문인들 의사, 약사, 변호사, 회계사, 간호사들은 맡은 직분대로 동포사회에 해마다 수시로 분야대로 한인사회에 대가없는 봉사활동을 펼쳐온 것을 생각하면 비록 내가 직접 혜택을 받지 않았을 때도 참 좋은 일들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생면부지의 전문인으로부터 전연 예기치 않은 호의를 받고 보니 이런 경우에는 무어라 그 고마움을 표시할까? 여하튼 나는 그 미지의 여인에게 신세를 진 일이 있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선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흔히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각박한 이민생활에 같은 동포에게 크던 작던 선행을 베푸는 전문 직업인이 우리사회에 이렇게 있다는 사실은 고달픈 타국살이에 한바탕 불어주는 청풍(淸風)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틀림없이 마음 뿐만 아니라 얼굴도 고운 여인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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