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알츠하이머와 레이건

2000-09-1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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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칼럼

▶ 이 철(주필)

나이먹은 사람들에게 호랑이보다 더 무섭고 귀신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알츠하이머’(치매증)가 될 것이다. 알츠하이머는 자신이 일평생 쌓아 올린 위엄과 자존심을 한순간에 무너 뜨린다. 예를 들어 교장 선생님 출신 시아버지가 며느리 앞에서 옷을 훌러덩 벗거나 할머니가 손자들 앞에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위엄이 바닥까지 내려온 셈이다.

알츠하이머의 가장 고통스런 부산물은 가족관계의 파괴다. 간병을 오래 하다 보면 부부간에 지치거니와 자식들과도 정이 끊어지게 된다. 더구나 누가 간병을 맡느냐를 둘러 싸고 신경이 날카로울대로 날카로워져 나중에는 가족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 알츠하이머는 보통 65세 이상에 찾아 오는 병이며 100명중 10명이 걸리는 확률을 보이고 있으니까 꼭 남의 일만은 아니다. 85세 이상에서는 확률이 45%나 된다.

치매증의 시초는 기억력 쇠퇴와 우울증에서부터 시작된다. 1단계는 친구들 이름을 잊어버리고 모임을 피하며 쇼핑을 하고 나오면 자기가 어디에다 파킹했는지 기억이 안나 차를 못찾는다. 그리고 의심이 심해지고 피해망상증이 생겨 “누가 나를 미행한다”“누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소리를 하는가 하면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벌컥 낸다.


2단계는 가족들의 이름을 못 외우며 점심 먹고도 안 먹었다고 우기고 집을 나가면 길을 잃는다. 또 괴상망칙한 스타일로 옷을 입으며 냉장고속을 계란으로 가득 채운다거나 양말을 마이크로오븐에 넣어 말리는등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3단계는 오늘이 몇 년 몇 월인지 모르며 가족들 얼굴도 알아 보지 못한다.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다. 임종직전의 현상이다. 보통 자다가 편안하게 숨을 거두며 이 점이 치매증의 유일한 긍정적인 면이다. 사람이 죽었다 하면 초상집에서 통곡소리가 들려야 할 텐데 치매증으로 죽은 상가에서는 통곡이 별로 없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지만 알츠하이머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은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알츠하이머에 왜 걸리는가? 아무도 모른다. 알츠하이머를 어떻게 고치는가? 아무도 모른다. 치료약이 곧 개발된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그것도 확실치는 않다.

요즘‘I LOVE YOU, RONNIE’라는 신간서적이 출판되어 화제다. 레이건 전대통령이 평생 동안 부인에게 보낸 편지 모음에 낸시의 짤막한 논평이 깃들여져 있다. 대통령을 지낸 레이건이 알츠하이머와 어떻게 싸우고 있고 간병자인 낸시 여사가 그 고통을 어떻게 참고 매일매일을 보내는가가 궁금해 책이 나오자마자 서점에 달려가 한권을 사들었다.

거기에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레이건의 근황에 대해 신문에 보도된 것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레이건이 의사로부터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선언을 받은 다음 94년 11월 5일 국민에게 보낸 메시지의 전문이 실려 있는데 매우 감동적인 내용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최근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 사실을 공개하느냐 마느냐로 고민했지만 이 병을 앓는 환자들과 고통받는 그 가족들을 위해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닥쳐올 괴로운 경험으로부터 낸시를 구할 방법이 없나 생각했으나 희망일뿐입니다. 낸시는 용기와 신념으로 이 고난의 시간을 이겨나갈 것입니다. 자, 이제 나는 황혼의 여행을 시작하려 합니다. 잘 있으시오, 친구들이여- 신의 은총이 있기를. 로널드 레이건.”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다. 그러나 죽음은 인생의 완성이기도 하다. 알츠하이머의 긴 여행을 하기전에 레이건이 쓴 이 편지는 인간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장엄한 순간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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