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병 고쳐야 새 시대 열린다.

2000-08-0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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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시대와 의식의 인프라

▶ 장석정<일리노이주립대 교수>

기대와 흥분으로 2000년을 맞은지 반 년이 흐른 지난 6월말 한국을 방문하고 왔다. 사람과 차량이 홍수를 이루고 여러가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듯 했다. 하지만 이번 귀국은 반세기 분단이래 처음 있었던 남북정상회담 직후의 방문이어서 조금은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3년 전의 위기를 여봐란 듯이 극복하고 다시 성장궤도에 오르고 있는 한국경제의 모습도 대견스러웠다. 특히 세계첨단이라는 인터넷사업, 정보통신산업의 진전은 거리에 널려 있는 PC방이나 사람들이 손목시계처럼 갖고 다니는 휴대전화를 통해서도 잘 읽을 수 있었다. 늘어나는 해외여행객으로 공항은 북새통이고 경기회복에 따른 소비지출의 증가로 골프장, 룸살롱 등도 만원이라는 얘기다.

어쩌면 한국은 이미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기쁨을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은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이었지만 왠지 한편으로는 조그만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과연 안팎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듯이 새로운 세계질서가 자리잡고 있는 가운데 이제 인류문화와 문명의 주역이 바뀌고 있는 것일까? 중세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 피어났던 인류문명이 지난 세기중 대서양을 건너와서 북미대륙에서 풍요를 이루었지만 앞으로는 태평양을 지나 동아시아지역으로 건너갈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벌써 실현되고 있다는 말인가? 한국이 이미 그 변화의 주역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실제로 새로운 동아시아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지 한국이 이미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는 여건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그 어느 때보다도 화해와 통일의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는 남북관계의 진전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데다 앞서 말했듯이 컴퓨터와 인터넷에 관련된 첨단산업을 바탕으로 한국경제가 지속성장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 익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의문이 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아시아가, 아니 한국이 인류문화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인공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을 말해주는 요소들과 여건들은 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한데 묶어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바탕과 제도적인 장치, 즉 인프라가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사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인프라가 아직 선진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전역에 걸친 문제라고 안팎에서 지적되고 있다. 우선 경제발전과 아울러 개방된 민주사회를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이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많은 정치적 긴장이나 변동의 요인을 안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경제기반의 기본적 취약성이 상존하고 있다. 가령, 한국은 지금 반도체를 많이 수출하고 있으나 그 반도체를 가공하는 기계 및 기술력을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효율적인 자유시장경제의 구조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고 소득분배의 불균형, 발전의 지역적 불균형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만연하는 부정과 비리가 고개 숙일 줄을 모르고 인구집중으로 인한 혼잡과 범죄증가, 환경침해가 경제의 고비용구조를 더욱 조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을 새로운 시대의 주인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시민의식(civility)의 취약한 인프라라고 생각한다. 아직 질서와 책임을 앞세우는 민주시민, 선진시민으로서의 건전한 의식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일류병, 획일성, 폐쇄성, 집단이기주의, 지역감정 등, 이른바 한국병이라고 일컫는 여러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한 한국은 새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고정관념을 떨치고, 교통질서를 지키고, 선거를 바로 치르고, 언어를 순화하고, 책임과 도덕성을 세우고, 관료주의를 없애는 건전하고 책임있는 시민의식이 정착되지 않는 한 한국의 시대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건전한 의식의 인프라가 결여된 시스템전체에 대하여 환멸을 느낀 나머지 해외이민의 보따리를 싸는 3,40대가 다시 많아지고 있다는 얘기가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새로운 시대는 저절로 열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갖다 안겨 주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시대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고 스스로가 열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주역이 되기 위한 자세와 준비를 스스로 갖추어야만 한다. 의식의 인프라를 충실히 하기 전에는 기대와 흥분으로 꿈꾸어 보는 동아시아의 시대는 그저 기대와 흥분만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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