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목들의 공생

2000-08-0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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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에세이>

▶ 박봉현 (사회2부 부장)

「제너럴 셔먼」 키 274피트9인치, 밑동둘레 102피트9인치(직경 약 40피트), 몸집 5만2,500입방피트(270만파운드). 「워싱턴」 키 246피트1인치, 밑동둘레 101피트1인치, 몸집 4만7,850입방피트. 「프레지던트」 키 240피트9인치, 밑동둘레 93피트, 몸집 4만5,481입방피트. 「링컨」 키 255피트8인치, 밑동둘레 98피트3인치, 몸집 4만4,471입방피트. …

세코이아 국립공원내 ‘자이언트 숲’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수십 그루의 거목중 일부다. 이들은 25층짜리 고층빌딩과 어깨를 견줄 만하다. LA 다운타운 마천루를 옮겨 놓은 셈이다. 나무 밑동의 직경은 웬만한 로컬 도로보다 폭이 넓다. 옆에 서보면 영락없는 ‘매미’가 된다.

나이도 적게는 1,800살, 많게는 2,700살이나 된다. 화재도 30인치나 되는 두꺼운 껍질과 고유의 화학성분으로 무장한 이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 풍상을 겪고 문명 세계의 부침을 지켜본 인류역사의 ‘산증인’이다.


제한된 구역에서 이처럼 덩치 큰 나무들이 오순도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주어진 땅에서 서로 자양분을 빨아들이다 보면 한두 나무만 군림하고 다른 나무들은 말라죽거나 자잘해질 것이란 상식이 가차없이 깨진다. 이전투구란 틀에, 상대방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인식에 순치된 터라 거목의 건실한 공존이 낯설기만 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 거목이 매년 보통덩치의 나무 높이인 50~60피트만큼을 불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에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커 가는 것이다. 한 나무의 ‘기’가 다른 나무에 미치고, 이같은 작용이 수천년간 지속된다. 이웃 나무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는 모습들이다.

인간사회에도 거목의 상생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는 서로를 아끼고 치켜세우는 구성원들의 자세에 달려 있다.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분쟁은, 제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돼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한인타운에서 빈번한 단체간 불협화음, 자리다툼, 상대방 깎아 내리기도 같은 맥락이다.

미대선을 앞두고 공화, 민주 양측이 가시 돋친 인신공격성 독설을 퍼부으며 확전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도 벌써 차기 대선후보 자리를 차지하려는 물밑작업이 혼란스럽다. ‘라이벌 죽이기’가 도를 더해가고 있다. 모두를 위한 선의의 경쟁이 궤도를 일탈하면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미국의 중재로 캠프 데이비드에서 계속됐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 중동평화회담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자기 이익만 꾀하려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소탐대실의 한 사례다. 토지소유권과 관련해 백인을 중심으로 한 야권과 짐바브웨 흑인 정부간에 야기된 일촉즉발 양상은 거목들을 안타깝게 한다.

인도 카슈미르주에서 독립파 민병대와 경찰간 총격전으로 100여명의 사상자를 낸 것도 거목 보기에 부끄러운 일이다. 페루 후지모리 대통령의 3선 연임에 반대하며 퇴진을 요구하는 4만여 시위대와 당국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아 정정불안을 낳는 것도 공생원리를 백안시한 채 ‘제로섬 게임’만을 좇은 결과다.

디지털 혁명이 사회의 개체화에 속도를 붙이고 있는 요즘, 이웃을 치켜세우며 더불어 사는 삶을 목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수십년간 으르렁대던 남북의 정상이 서로를 좋게 평가하는 모습은 신선하다. 더운 여름이라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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