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앵무새를 만들지 마세요

2000-07-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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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영어학습 열기

▶ 정진철씨(라디오 서울 부사장)

한국의 영어교육은 예나 지금이나 확고한 체계를 세우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같다. 해방 후부터 90년대 초까지 한국식 영어교육은 회화는 도외시하는 문법위주의 주입식 교육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회화를 위주로 하는 실용교육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또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다. 문법과 회화를 균형 있게 조화시켜 가르치는 교육적 배려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렇게 보면 요즘의 영어교육도 지난날의 영어교육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다.

한인 이민 1세들이 한국서 영어교육을 받을 당시 영어교육은 문법 위주였다. 그래서 영어 문장을 해석하거나 영작문을 할 때에는 큰 불편이 없던 사람들이 회화에서는 벙어리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중학교 1학년에서부터 대학교 4학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0년 동안 영어를 필수과목으로 배웠지만 미국으로 건너 왔을 때 영어 회화에 자신이 없던 게 대부분 1세들이 공통으로 겪은 경험이다. 1세들은 그래서 10년이란 세월을 영어공부에 투자하고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 미국인들에게 본의 아니게 무식쟁이 취급을 당해 오게 된 것이다. 한국의 교육 행정이 절름발이 영어교육을 해온 결과다.

한국이 세계화에 눈을 뜨면서 영어 회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그동안의 영어교육이 잘못됐다는 자각과 함께 문법 위주에서 회화 위주로 한국의 영어교육 패턴이 바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어 열기가 세계화 바람과 함께 날로 뜨거워져 아예 초등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획기적인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도 교육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 깊이가 없는 주워섬기기 식의 영어교육이 과연 옳은 방식일까 하는 점이다.
한국에서 영어 열기가 확산되면서 ‘영어의 수요와 공급’ 불균형 현상이 일고 있다고 한다. 회화 중심의 영어를 배우려는 사람은 급격히 늘고 있는데 가르칠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몇달 동안 미국에서 영어 연수를 받고 왔다는 사람이면 영어학원 강사로 초빙되는 세상이 됐다는 것이다. 영어에 대한 체계적 지식도 없이 비슷하게 혀만 잘 굴리면 유능한 영어 교사로 인식되는 시대가 요즘의 한국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세태에서 영어교육과 관련해 온갖 해프닝이 만발하고 있는 모양이다. 마치 특효약이라도 팔 듯이 영어 마스터법을 요란하게 선전해 대는 학원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해 있다는 것이다. 학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마치 ‘영어 도사’ 인양 선전을 해 대면 수강생들이 우르르 몰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특효약 팔 듯이 선전에 열을 올리는 강사일수록 엉터리가 많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잘못 돼가고 있다. 미국에 간다는 것이 일부 특수층의 특권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나 통하던 시절 이야기 같이 들려서다. 그 때 그 시절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도 있다. "특수층 집안의 한 여고생이 연수차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몇달 후 귀국해 김포공항에 내렸다. 이 여학생은 한국말을 잊어버렸는지 영어로만 말을 해댔다. 당시만 해도 미국을 가 본 사람은 손꼽아 헤아리던 시절. 해서 과연 선진국 미국은 영어 회화도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빨리 가르치는가 하는 착각과 함께 여러 사람이 감탄했다고 한다."

미국을 제주도쯤 가듯 들고 나는 게 요즘의 한국인들이다. 미국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세상인데 단지 몇달 동안 미국에서 영어 연수를 받았다고 완전한 영어 교사가 된 양 받아들여진다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닐까. 문법만 파고드는 교육방식 때문에 10년씩 교육을 받고도 여전히 영어 벙어리로 남아 있는 옛날식 교육은 확실히 잘못된 영어 교육이다. 그렇다고 해서 회화만 강조하다가 학문적 바탕도 없이 단순한 앵무새를 만드는 요즘의 영어교육도 문제가 있다. 영어교육에는 따로 왕도가 없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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