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치매노인에게 필요한 것

2000-07-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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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영순·애나하임 거주

며칠 전 일이다. 한적한 동네인데 길거리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어서 웬일인가 싶어 차를 멈추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한 할머니가 유모차를 몰고 나왔다가 넘어져 조금 다친 모양이다. 그냥 지나치려니까 한 미국인 주민이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친 할머니는 한국분이셨다. 말이 안 통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미국인 주민의 말이었다. 할머니는 그런데 횡설수설하시는 것이었다. 유모차를 몰고 나왔으니까 근처에 사실 게 틀림없는데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하셨다. ID 같은 것도 없고 어떤 메모나 연락처를 적은 종이 같은 것도 없었다.

깨끗하게 차려 입으셨고, 용모도 단정한 할머니인데 가만히 보니 치매환자인 것 같았다. 말은 안 통하고 참으로 답답해 경찰에 인계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다행히 가족이 현장에 나타났다. 가족들의 이야기로는 친정 나들이를 온 딸(할머니에게는 손녀)이 데리고 온 아기가 없어져 집안을 찾다보니 할머니도 방에 안 계시더라는 것이다. 온 집안 식구가 인근을 찾다가 결국 집에서 꽤 떨어진 이 곳에서 할머니와 아기를 찾게 됐다는 것이다.


이 할머니는 비교적 증세가 가벼운 치매환자였다. 가족들도 할머니가 환자여서 조심했었는데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증손녀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밖에 나섰다가 길을 잃고 넘어져 다치신 것이다. 한적한 동네인 데다가 또 친절한 미국인 주민들이 도움을 주어 그나마 큰 불상사는 없었다. 그만하면 다행이었다.

주변에 보면 사실 치매증세의 노인들이 많으시다. 비교적 가벼운 증세의 치매환자 노인을 모신 한국분들은 노인을 차마 양로원에 보낼 생각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 죄스럽다는 것이다. 이 할머니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괜찮으시다가 가끔 이상증세를 보일 뿐인데 어떻게 가족과 떨어져 양로원에서 혼자 사시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심정이다.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남의 일이라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24시간 옆에서 돌보아 드릴 수 없으면 양로원에 보내드리는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할머니인들 정신이 올바르셨다면 귀여운 증손녀가 이같이 위험한 처지를 당하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늙은 부모를 양로원에 보낸다는 것은 한국인 입장에서는 선뜻 내려지지 않는 결정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노인들에게 길을 잃어버려도 금방 찾을 수 있도록 목걸이에 전화번호 등을 새겨 놓거나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주머니에 꼭 넣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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