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혼 반란

2000-07-1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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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칼럼

▶ 이철 <주필>

7월 11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이혼에 관한 재미있는 칼럼이 실려 있다. 필립 하비가 쓴 이 칼럼은 이혼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고 사회가 건강해지고 있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수명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서 같은 배우자와 30~50년을 같이 산다는 것은 너무 지루하며 부적절하다”

“물론 어린 자녀들에게는 부모의 이혼이 마음의 상처를 남길수도 있다. 그러나 이혼하지 않음으로써 자녀가 학대당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북한을 새로운 눈으로 봐야 하는 시대가 찾아온 것처럼 ‘이혼’도 다른 앵글에서 바라볼수 있는 시각의 변화를 사회가 요구하고 있다. 이혼문제가 배우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 가정에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혼은 자기 성찰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여성은 “나는 누구인가”“나의 삶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등의 질문이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게 되며 대개 그 시기는 50세를 넘으면서 부터다.


남성이 세워 놓은 궤도를 따라 삶을 누려 왔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의 인생이 ‘나의 인생’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아이 기르고 부엌일을 돌보는 등의 뒷치닥거리만 하는 2류인생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남자는 남자대로 고민이 있다. 젊었을 때는 꿈이 있고, 활기 차고, 직장 있고, 남에게 인정받다가 50세가 넘어 돈 없고, 힘 없고, 거기에 직장까지 없으면 박력 없는 인간으로 비쳐 견디기 힘들다.

“내가 돈 버는 기계였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아내가 아이들에게만 관심 쏟는 것 같아 자신은 이방인이 된 기분일 때도 있다. 이래서 남자는 남자대로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
요즘 한국에서 ‘황혼이혼’이 화제다.

지난 7월 4일자 본국지 사회면에 73세 된 어느 대기업회장의 부인이 77세 된 남편에게 이혼장을 냈다. 놀라운 것은 이 할머니가 1,000억원의 위자료를 청구했으며 이혼사유가 “남편의 구타와 외도로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수 없다”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편 7월 10일자 신문에는 ‘1,000억 재산 털어 장학재단 설립’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미담의 주인공은 삼영화학 그룹의 이종환회장이다. “이회장은 양복 한벌을 수십년씩 입고 다녔으며 구내식당을 이용할 정도로 검소가 몸에 밴 기업인으로 이번 장학재단 설립도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사업철학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기사화 되어 있다.

문제는 73세 된 할머니가 더 이상 학대를 못 참겠다며 이혼소송을 낸 남편이 바로 이종환회장이라는 점이다. 이 대기업 총수를 무슨 잣대로 재어 평가해야 할지 황당한 느낌이 든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인이 집에서는 학대 남편으로 평가되고 있으니 말이다.

할머니가 주장한 것처럼 남편의 구타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부부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로 까지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 때리는 남편은 70세가 넘었다 해도 이혼당할수 있다. 그러나 요즘 한국에서 번지고 있는 황혼 이혼 붐(?)의 내용을 살펴 보면 부인들의 위자료가 엄청나 재산분배 싸움이 아닌가 느껴지는 면도 있다. 돈만 있으면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하고,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남자가 돈이 없다면 황혼이혼율이 증가할까. 결국 돈이 ‘황혼의 반란’을 부추기는 점도 있다. 밥 먹고 살 만큼 돈도 적당히 벌어야지 재산이 너무 많아지면 늙어서 천연두 앓는 식의 망신살이 뻗치게 된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가 불조심 구호라면 21세기 남성구호는 “아내 얼굴 다시 보자. 황혼반란 일어 날라”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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