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아버지, 딸의 아버지.

2000-07-0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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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식구들이 영화관람을 했다. 오늘도 남편이 보고 싶은 영화와 아들이 보고 싶은 영화가 틀려서 남편과 딸, 그리고 나와 아들이 편이 되어 영화표를 끊었다. 남편은 늘 딸을 이뻐하고 많이 생각한다. 딸도 좀 어려운 일이나 허락이 안될 것 같은 문제는 언제나 남편한데 먼저 말을 해서 나에게 동의를 받아내곤 해 가끔씩 딸로 인해 남편과 언성이 오가곤 한다.

어떤 때는 딸아이가 아빠한테 너무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도 되지만 남편과 딸의 정다운 모습에 나와 아들은 가끔씩 시샘을 하기도 한다. 남편은 아무리 피곤해도 딸아이가 처음 가는 길은 하루 전날 같이 가서 길을 알려준 후에야 그다음날 혼자서 운전을 하게 하고 딸아이가 머리염색을 하고 싶다고 하면 절대 안된다는 나를 이해시키면서 딸의 말을 들어줬고, 나에겐 귀 뚫는 것도 반대하던 남편이 딸에겐 쌍꺼풀 수술을 하러 타주까지 보내준다.

나에겐 그런 아버지가 없었다. 사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바람둥이셨던 아버지는 나와의 생활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난 아버지가 있는 친구들이 미웠다.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주셨다는 사탕과 바나나를 자랑하는 친구도 싫었고 출장에서 돌아오실 때면 언제나 호도과자를 사다준다는 친구들이 샘이나서 난 늘 나와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11살쯤 되었을때 동네 아주머니네 집으로 아버지가 전화를 할테니 미리 가서 기다렸다 받으라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난 그날 저녁 밤을 설쳤다. 나의 아버지가 어떻게 생기셨을까, 어떤 분일까. 나에게 얼마나 잘 해주실까, 또한 그동안 사탕과 바나나 그리고 호도과자를 못사준 아버지가 되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를 껴안고 우실까 하는 많은 상상으로 난 그날 밤을 꼬박 세웠다. 다음날 수화기를 받은 나의 손은 떨리고 그렇게 쨍쨍하던 나의 목소리는 입만 뻐끔거리고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몇번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물음에 겨우 “네”라는 대답만 하곤 내내 난 울기만 했다.

난 그동안 아버지가 그리워서 울었고, 같은 서울에서 살면서도 나 몰라라 했던 아버지가 미워서 울었다. 미안하다고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말 한마디가 없으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 마냥 수화기만 들고 울었다.

그후 몇번의 만남에서 내가 생각하고 상상했던 그런 아버지가 아님을 알고서는 많은 실망을 하곤 서로 별 연락 없이 나의 생활을 했다.

그런 어느날 친정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서 한참을 망설이다 늦은 시간에 장례식에 도착했지만 소복을 입은 나는 전혀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아버지의 관이 땅속에 묻히면서 한 삽의 흙을 붓는 순간 “당신은 너무 무정한 아버지였어요” 라는 말을 되뇌며 난 내가 서러워서 한참을 울었다.

며칠전 신문에서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고 신부의 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하였다는 글을 읽으면서 나도 같이 울었다. 몇 년후가 될지는 몰라도 남편도 딸아이를 시집보내고서는 많이 울것 같다. 나의 바램은 두 아이들이 아빠의 사랑을 알고 아이들 또한 아빠를 사랑하면서 나중에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도 늘 그립고 보고싶은 그런 아빠가 되는 것이다.

이성림<콜로라도, 포트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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