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

2000-06-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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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 대통령들이 재임기간 ‘통치자금’이란 명목으로 수천억원의 돈을 모았다 한다. 그 불법적인 돈도 문제이지만 나는‘통치’라는 말이 몹시 귀에 거슬린다. 한국의 식자들은 대통령을 흔히‘통치권자’라고 부르고 그가 하는 일을 ‘통치행위’라고 즐겨 말한다. 요사이 남북 정상회담 후로는 북한의 김정일을 가리켜 ‘통치의 달인’이라고 칭찬한다던가! 이 말은 적절한 것 같다. 그는 실제로 국민을 통치하니까.

그러나 민주국가인 한국에서 대통령이 통치자이면 국민은 피통치자란 말인가?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조항은 초등학교생도 다 아는 사실인데 왜 한국의 식자들은 자기를 비하하여 피통치자로 전락하고 국민의 공복인 대통령을 왕 같이 떠받치고 싶어하는가. 현실이 이러니 누구든(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도) 대통령만 되면 왕이 된 것으로 착각하고 왕 같이 행동한다.

한국의 헌법이나 행정기구는 민주주의 표본인 미국을 본따, 모든 제도가 미국과 비슷하다. 다른 것은 시행 방법뿐이다. 한국도 미국 같이 삼권이 분립된 민주국가이나 실제 한국에서는 삼권분립이란 없다. 마치 이조시대의 왕 같이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혼자 쥐고 휘두른다. 한국의 모든 주요 벼슬자리는 대통령이 사실상 임명하고 파면한다. 삼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이나 대법원장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개인기업도 대통령의 지배(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통령의 눈에 나면 아무리 큰 기업도 하루아침에 망해버린다. 우리는 이런 기업의 흥망을 수없이 보았다. 한국에서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 마치 대통령 한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 같다.


한국은 미국과 똑같은 제도를 가지고도 왜 다른 결과를 낼까? 나는 대통령을 ‘통치자’로 오인하는 국민들의 사고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모든 행정관청은 무슨무슨 Service라 한다. Internal Revenue Service, 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 Agricultural Research Service 등등. 문자 그대로 국민을 위한 서비스 기관으로 자처한다. 대통령도 4년 임기 동안 자기 능력껏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깨끗이 물러나 다음 사람이 일을 잘하도록 도와준다. 정권을 물려주면서 평화적으로 물려주었다고 자랑하는 그런 낯뜨거운 일은 없다.

미국서는 대통령직을 국민 위에 군림하여 국민을 통치하는 자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한 예로 국무회의를 하는 미국과 한국 대통령의 자세를 비교해 보라. 미국 대통령은 각료와 같은 입장에서 둘러앉아 사안을 논의하는데, 한국 대통령은 비디오에서 보는 이조시대의 임금과 신하의 자세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모든 회의는 그 한 사람을 위한 그 한 사람에게 보고하는 자리다.

한국은 흔히 경제선진국, 정치후진국이라 한다. 왜 그 똑똑한 한국사람들이 자기를 비하하여 피통치자로 자처하고 대통령을 왕으로 모시어 정치후진국으로 주저앉으려 하는가? 혹자는 정치 제도가 잘못되었으니 내각책임제로 바꾸자느니, 부통령제를 부활해야 한다느니, 여러 주장이 많으나 나는 제도가 아니라 그 시행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각책임제나 부통령제는 우리가 모두 해보고 나서 지금의 제도를 택한 것이다. 똑같은 제도를 가지고도 미국은 잘해 가는데 우리는 왜 못할까?

해결책은 쉽다. 민주주의 선배인 미국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그대로 본뜨면 된다.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국민들은 미국시민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면 된다. 클린턴이나 닉슨 대통령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국민들이 어떻게 그들을 힐책했으며, 대통령직을 물러난 카터 대통령이 퇴임 후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민주주의 후배인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김성자<이스트 뉴올리언스 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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