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호구지책과 생존권

2000-06-2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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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삶

▶ 김명욱 <본보 뉴욕지사 편집위원>

얼마 전 뉴욕시 한인 택시운전사 한 명이 함정수사에 걸려 택시 운전면허를 영구 박탈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유인즉, 히스패닉계 손님으로 가장한 경찰에게 승차거부를 해 인종차별 혐의를 받고 처벌대상이 된 것이다. 또 얼마전 흑인교수 한 명이 택시를 세우려다 운전사들에게 여러번 승차거부를 당하여 인종차별 문제로 비화된 일도 있었다.

이렇듯 뉴욕시내 택시운전사들이 유색인종에게 승차거부를 하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 아니면 그렇도록 그들(흑인, 히스패닉)이 만들어 가는 것일까.

뉴욕에서 택시운전을 호구지책으로 연명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뉴욕 택시운전사들의 애로를 잘 모를 것이다. 택시운전사는 누가 택시를 세워도 승차를 거부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뉴욕의 택시운전사가 히스패닉이나 흑인들에게 승차거부를 하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호구지책과 관련된 생존권의 문제가 여기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83년과 84년 그리고 93년과 94년 사이 뉴욕에서 택시운전을 한 적이 있다. 물론 호구지책이었다. 택시운전사들은 한국과 비슷해 하루 2부제로 근무한다. 새벽 5시부터 오후 5시, 오후 5시부터 새벽 5시. 하루 근무는 거의 12시간으로 중노동에 속한다. 회사에 입금시키고 기름 넣고 나면 하루 80달러를 벌기 힘들다.

택시들은 주로 맨해탄에서 운행되는데 이유가 있다. 손님이 많다. 그리고 손님이 내리면 빨리 다른 손님으로 태울 수 있다. 거의 빈 시간이 없다. 이렇게 10시간에서 11시간을 계속 태우고 내려야 그날 수입을 겨우 올릴 수 있다. 하루 30명에서 40명을 태워야 한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브롱스나 퀸즈 혹은 브루클린 손님을 태우면, 갈 때는 좋지만 다시 맨해탄으로 들어올 때는 빈차로 들어와야만 한다. 그러니 30분에서 1시간 정도 빈차로 운행해야만 하니 벌이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 가지곤 택시운전사로서 절대 승차를 거부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에 있다. 나는 주로 밤 택시를 운행했다. 인종차별을 떠나 밤에 손님이 택시를 세울 때는 인도적인 면에서도 흑인이든 히스패닉이든 가리지 않고 나는 태웠다. 그러나 그 횟수가 줄어 들 수밖에 없는 일을 당한 뒤 나도 가려 태울 수밖에 없는 실정에 놓이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브롱스나 브루클린을 가면 돈을 떼어먹히기가 십상이었다. 아파트 앞에 택시를 세워놓고 돈 가지러 간다 해 놓고는 20-30분 기다리다 그냥 맨해탄으로 들어올 때도 있었다. 이럴 땐 돈도 잃고 시간도 뺏긴다. 또 어떤 때는 손님이 아예 아무말도 않고 그냥 걸어나가 감히 따라 갈 수 없던 때도 많았다. 따라 갔다간 강도 당하거나 칼에 찔리기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방탄막이가 돼 있는 택시라 다행히 강도를 당해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몇 번 당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택시를 세우기가 겁이 난다. 이럴 때 이걸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건 절대 인종차별은 있어서는 안된다. 이건 법 이전에 천도이다.
그러나 택시운전사들의 하루벌이는 호구지책이자 생존을 위한 투쟁이며 자기 생명까지도 걱정하게 된다. 한 번만 당하면 “어이, 재수없어!” 그걸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자꾸 당하다 보면 그들을 태울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모두가 다 이유가 있다. 자꾸 택시운전사들만 나쁘다고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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