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사청문회 코미디

2000-06-2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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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가 만사’라고 했던가. 적재를 적소에 배치하는 게 인사의 요체. 말이 쉬워 그렇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공직자 인사가 ‘망사’가 되지 않게 해주는 제도적 뒷받침이 미국의 인사청문회다. 요즈음 그러나 인사청문회 병폐론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한번 주요 공직에 지명됐다 하면 백악관 자체 조사에서부터 상원 인사청문회에 이르는 과정에서 넘어야 하는 산이 하도 많아 보통 스트레스가 쌓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1964∼84년 준 각료급 이상 고위직에 발탁된 사람중 최초의 백악관 접촉에서 상원 인사청문회의 동의를 얻기까지 6개월 이상 걸린 케이스는 전체의 5%선이었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11%, 부시 행정부에서는 25%,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무려 44%의 고위 임명직들이 6개월 이상 소요되는 까다로운 인사청문회 절차를 겪은 후에나 감투를 쓰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추세를 감안하면 조지 W. 부시나 앨 고어 중 누가 대통령이 되든 간에 차기 행정부는 그것도 운이 좋아야 새 행정부 출범 9개월이 지난 2001년 11월께나 주요 공직 인선을 매듭짓게 된다는 전망이다. 그러니 인사청문회 병폐론이 제기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국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이한동 총리서리에 대한 인사청문회로, 말하자면 처음으로 이뤄진 공직 후보자에 대한 ‘공개적 검증절차’라고 해서 관심과 기대가 한껏 높았다. 그런데 TV를 통해 지켜보던 시민들은 이틀만에 외면, 급기야 방송사들도 생중계를 단축했다는 보도다. 새 포맷의 청문회 정치 쇼가 곧 ‘저질’로 드러나서다.

한 나라의 총리를 하겠다는 사람이 말바꾸기는 예사이고 태연한 거짓 증언에, 10분 주기로 표정이 바뀌고 말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를 연출한 게 여권 의원들은 봐주기식 아첨성 발언. 또 야당 의원들의 공세도 김빠진 꼴이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는 청문회인지조차 모를 지경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한국 국회가 도입한 인사청문회는 미국의 인사청문회법을 그대로 적용했다. 미국의 인사청문회법은 그러나 미국적 정치 상식을 토대로 제정된 법이다. 항상 권력의 편에 서서 말장난에, 거짓 증언도 예사인 인물은 설자리가 없는 게 미국적 정치 상식이다. 이같이 미국적 상식으로는 총리는커녕, 정치적 생존조차 불투명한 사람을 불러놓고 미국식 인사 청문회를 했으니 저질 코미디가 되는 것은 애당초 정해진 수순인 셈이다. 하드웨어만 흉내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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