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일의 약속’ 저자 정동규 심장내과의

2000-06-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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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50주년 특별초대석

-6.25 50주년이 되었습니다. ‘3일의 약속’이 나온지는 11년이 되었군요. 6.25를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

▲전쟁이 났을 때도 일요일이었는데 이번에도 6.25가 일요일이로군요. 지난 주 남북정상회담도 열리고 해서 이번 6.25는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6.25로 많은 사람들의 생애가 영향을 받았지만 내 경우는 정말 파란만장했습니다. 6.25가 안터졌으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를 가끔 생각해봅니다. 아마 이북의 내 누이들과 똑같이 살고 있겠지요.

-‘3일의 약속’의 ‘3일’은 ‘3일간 전략상 후퇴한다’던 한 국군의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책에 쓰셨던데, 결과적으로 그 말이 일생을 바꾸어 놓았군요.


▲그렇지요. 청진의과대학에 다닐 때 전쟁이 났습니다. 처음 몇주는 평상시와 다름없었는데 9월말 인민군 입영명령서가 나왔어요. 어머니가 나를 외가로 피신시켜 외갓집 곳간의 큰 독 속에 숨어서 7주를 지냈습니다. 11월21일 국군이 오고 나서 주을의 집으로 돌아와 부상자치료를 돕고 있는데 갑자기 국군이 남쪽으로 후퇴를 하는 겁니다. 한 군인을 붙들고 이유를 물었더니 ‘전략상 3일간 후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국군 따라 내려갔다가 3일 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날이 12월2일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마지막 뵌 날이로군요.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후 4시경 눈이 막 쏟아질 때였지요. 피난민 대열에 휩쓸려서 국군 따라 남하하다 보니 ‘3일’은 훌쩍 가버리고 일주일후 나는 함경북도 성진 부두에 수만명 피난민 중에 끼어있었습니다. 미해군 LST에 국군을 태우고 200명쯤 자리가 생겼는 데 운좋게 내가 탈 수 있었습니다. 12월12일 포항 아래 구룡포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대한민국 육군23연대 수색중대에 입대돼 곧바로 38선 부근에 투입되었습니다.
그후 32개월간 쉬는 날 하루없이 추위와 굶주림과 동상과 싸워가며 전쟁을 했지요.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지만 무서운 것은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번지도 없는 강원도 산골에서 죽으면 어머니가 외아들의 사체도 못 찾게 될까봐 그게 제일 무서웠습니다. 1953년 7월27일 전쟁이 끝났지만 갈데가 없어 3년 더 군복무를 했습니다. 제대한 날 일선에서 버스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밤 12시였는데 정말 막막하더군요. 돈 한푼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 완전히 거지였지요. 지게도 지고, 명태장사도 해보고 별별 고생을 다했습니다.

- 그 어려움 중에서도 수도의과대학을 졸업했고 미국 와서 심장내과의사도 되었습니다. 스스로 ‘미국식’ 성공을 했다고 말했는데 그런 의지를 가능하게 한 원천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머니 만나서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이었지요. 일선에서 총알 맞고 쓰러져서도, 어렵게 독학하면서도 기어이 살아서, 혹은 기어이 공부 마쳐서 어머니께 보여드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습니다. 1960년 수도의과대학을 수석졸업했는데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옆에 계셔야 할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 서러워서 밤새 혼자 엉엉 울었습니다. 내게는‘어머니’가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 외아들을 끝내 다시 못보고 가신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어떠하셨습니까?

▲약속한 3일이 33년이 되고 나서야 83년 고향에 갔더니 어머니는 4년전에 이미 돌아가시고 안계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가슴에서 내가 한시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누이동생이 아침상을 들여와 “이 숟가락 알아보겠느냐”고 묻더군요. 내가 모르겠다고 하니 누이는 아주 섭섭해했어요. 내가 집 떠나기 전에 쓰던 것이었는 데 어머니는 그 숟가락을 매일 아침저녁상에 내 밥과 함께 놓고 아들이 곁에 있는 듯 하셨다는 겁니다. 누이가 벽에 걸린 거울도 보여주더군요. 내가 청진의과대학에 다닐 때 아침마다 머리 빗느라 보던 거울이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매일 아들 보듯 그 거울을 들여다보셨고, 주무실 때는 베개를 꼭 남쪽으로 하셨답니다. 아들이 남쪽으로 갔기 때문이었지요. 내가 아무리 어머니를 그리워했어도 어머니 마음에는 못 따라갔던 것 같아요.

-83년에 이어 86년 두 번째 방문 후에는 다시 고향에 안갔는 데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두 누님, 여동생과는 계속 교류가 있습니까?

▲편지는 계속 오지만 답장을 안하고 있습니다. 누님들이 많이 궁금해하는 줄 알면서도 소식을 끊고 있자니 마음이 퍽 괴롭습니다. 돈을 못 보내게 되면서 편지도 안 쓰고 있어요. 고향에 갔다온 후 명절이나 식구들 생일 때마다 몇백달러씩 보냈습니다. 당시 북한 노동자 월급이 25달러니 그만하면 큰돈이지요. 그런데 누이들이 편지 때마다 돈을 부탁하고 액수가 점점 커지더니 한번은 피아노를 사겠다며 수천달러를 보내달라고 했어요. 내가 가봐서 알지만 이북에서는 한 개인이 달러 들고 가서 피아노를 살수가 없습니다. 누님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 생활비를 쪼개서라도 얼마든지 돕고 싶지만, ‘뭔가 사정이 있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후로는 연락을 끊고 있습니다.

- 남북정상회담도 성사되었으니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까요?

▲그래야 되겠지요. 이산가족 상봉한다고 해서 모두들 흥분하지만 이북의 가족들을 만나고 나면 곤란한 일도 간혹 생기더군요. 이젠 나아지겠지요.
-‘3일의 약속’책 나온 후의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책이 ‘디어 애비’에 소개된 후 미국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상징적 인물처럼 소개되지 않았습니까?

▲내 생애 가장 잊지 못할 경험은 92년 8월 미재향군인회 총회에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과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가 특별연설을 한 다음 내가 연설을 하고 표창을 받았습니다.

나는 울면서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후 “대한민국에서나 미국에서 한국인들이 누리는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참전 용사들의 피흘림의 덕분이었다”며 감사를 표했습니다. 9,500만 독자를 가진‘디어 애비’에 책이 소개된 후 편지가 6,000통이나 쏟아져 들어오고 강연 초청도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185번쯤 강연을 했지요. 6.25 50주년이 되어서 요즈음 또 다시 강연 초청, 미국 매스컴들의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미국사회에서는 6.25를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르지요. 강연을 통해 한국이나 한국전쟁에 대한 인상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까?

▲‘잊혀진 전쟁’이라는 말을 나는 아주 싫어합니다. ‘잊혀진 승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말은 90년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건립 모금파티에서 부시 대통령이 한 표현입니다. 공산군의 침략을 막아내 그 많은 피난민들이 자유를 얻고 나라가 지금처럼 부강해졌으니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미국인들은 북한 하면 완전히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들만 사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내가 강연때마다 말합니다. 내가 이북 사람이다. 배타고 피난하지 못했으면 나도 지금 북한사람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남한과 북한은 결국 같은 민족이니 통일해서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에게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3일의 약속’판매이익금 45만달러를 전액 한국전 참전기념비 건립기금으로 기부하셨는데 그 많은 액수를 기부하기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디어 애비’란에 책소개를 부탁할 때부터 이익금은 모두 참전비 건립기금으로 들어간다고 밝혔습니다. 5만4천명 젊은 미군들이 피 흘리지 않았으면 오늘 내가 이런 자유를 누릴 수가 없지요. 그들의 피에 비하면 45만달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95년에 후편으로 쓴 ‘잊혀진 전쟁의 회상’판매금은 펜실베니아에 세워질 ‘한국·베트남전 기념 교육센터’건립기금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내 어머니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남은 소원은 무엇입니까?

▲남북이 통일되는 것을 보는 것이지요. 한국사람들의 큰 자랑이 단일민족 아닙니까. 그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어서 모든 이산가족들이 서로 만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내 누이들과 조카들을 다시 보고 싶고, 어머니의 무덤 앞에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싶어요.

-그런 날을 위해서 우리 한인들 각자가 할 일은 무엇이 될까요?

▲한 사람이라도 더 이북에 있는 친척들을 찾아가 만나는 것이지요. 서로 대화를 해야 마음이 풀려요. 개개인의 마음이 풀리면 정부차원의 대화도 순조로워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38선부터 없애야지요. 화해하기로 했으면 완전한 용서를 해야 합니다. 남북이 과거의 잘잘못은 이제 덮어두고 앞으로 해야할 일들을 논의하길 바랍니다. 서둘러서는 안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50년 갈라져 있는 동안 말도 달라졌습니다. 6.25 1세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통일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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