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각 바꿔야 새세상 보인다

2000-06-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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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칼럼

▶ 이철주필

지난 6월 14일자 본보의 남북 정상회담 화보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6.25때 지리산 빨치산 두목이던 이현상의 딸이 김대중 대통령을 인민최고회의 회의장에 안내하는 장면이다. 만수대 의사당 부총장인 이상진은 빨치산 신화를 낳은 이현상의 무남독녀로 사진으로 미루어 60세쯤 되어 보였다.

6.25 세대에게 ‘이현상’은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이름이다. 그의 정식 직책은 조선 인민공화국 남조선 유격대 사령관이었으며 빨치산 소설, 영화등에 자주 등장하는 ‘남부군’ 사령관이 바로 이현상이다. 그는 지리산 빨치산의 대명사나 다름 없었고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몸이 오싹할 정도였다. 바람 같이 나타났다 바람같이 사라지는 ‘이현상’- 그는 특히 전투경찰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빨치산의 영웅이고 우상이었다.

신문기록에 의하면 이현상은 휴전직후인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화개장터 북쪽에서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 김용식경위가 지휘하는 수색대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빨치산 총사령관이 아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당시의 뉴스는 화제중의 화제였다. 이 현상은 비밀에 싸인 사나이였다. 바로 그의 딸이 이번에 김대중 대통령을 안내한 것이고 보면 “야, 정말 세상 이렇게도 달라질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6.25가 한국현대사에서 비극의 역사로 기록되는 것은 동족끼리 처절한 살륙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 점이 동서독과 다른 점이다. 동서독은 전쟁을 겪지 않아 원한 같은 것이 없다. 그만큼 대화하기도 쉬웠다.

6.25 전쟁에서 비극중의 비극으로 꼽히는 것이 지리산 전투다. 주민들은 공산주의가 뭐고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좌’냐 ‘우’냐의 택일을 강요당했고 그 어느 쪽에 서도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왜냐 하면 낮에는 경찰이 점령했고 밤에는 빨치산이 지배했기 때문에 어느 쪽에 협력해도 죽을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중립은 용인되지 않았다. 협조하지 않으면 협조 않는다 하여 또 죽였다. 인간은 이념적 대립으로 얼마나 잔인해질수 있는가의 표본이 지리산 전투다. 이병주씨가 쓴 실록 소설중에 ‘지리산’이라는 것이 있다. 이 소설은 빨치산이 어떤 사람들이고 이들이 왜 지리산을 활동무대로 택하게 되었는가를 그린 대하소설이며 주인공 박태영도 실재인물이다. 박태영은 지리산의 마지막 빨치산으로 그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것은 55년 8월 31일로 나타나 있다. 작가 이병주는 빨치산 박태영의 입을 통해 6.25의 비극과 책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 전체를 초토로 만들어 놓고 얻은게 무엇이요. 그 책임을 누가 져야겠소? 최고권력자요. 그런데 권력을 잡은 자가 물러설수 있겠소? 책임 전가할 제물이 필요하게 된게요. 그래서 종파주의자인 박헌영을 없애기로 한 것이요. 그런데 이현상 선생은 박헌영의 직계요. 이제 우리 빨치산은 빨치산답게 죽는 길밖에 남지 않았소.”

이현상도 사살되기 전 무등병으로 강등되지만 결국 빨치산은 많은 피를 흘리고 마지막에는 북조선에 배반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6.25가 남긴 가장 큰 죄악은 남북의 지도자들이 적의 개념을 이용해 동족끼리 증오하도록 만든 사실이다. 양쪽 인민들은 오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극우’ 아니면 ‘극좌’ 발언만이 옳은 것처럼 길들여져 왔다.

이제 새 세상의 새벽이 동트고 있다.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의 딸이 한국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며 안내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인식의 틀을 바꾸고 발상을 전환시키지 않으면 새 세상이 보일 리가 없다. 눈 떠 있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달리 할 때 뭐가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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