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하버드 졸업생의 죽음

2000-06-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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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코노미스트

▶ 민경훈 <편집위원>

유승엽(31)씨는 누구보다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아버지가 서울 명문대 교수로 재직중인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대 행정 대학원을 졸업한 후 작년 버클리대 법과대학원에 입학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여서 졸업만 하면 연봉 십만달러 이상의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씨는 이달 초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지금 미국을 휩쓸고 있는 벤처 열풍에 말려 든 것이 화근이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미국내 교육 열기를 피부로 느낀 유씨는 인터넷 교육 정보 사이트를 만들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 판단, 친구들과 교육 관련 벤처 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이던 사업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꼬이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 돈 들어가는데는 많고 수입은 없고...

친지들에게 손을 내밀어 10여만달러가 넘는 돈을 마련했지만 순식간에 모두 사라지고 날이 갈수록 빚과 이자는 늘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격려해 주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유씨는 갚을 수 없는 빚독촉에 시달렸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유씨는 결국 귀국, 30대의 한창 나이에 목을 매는 길을 택했다.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기업을 세운 후 상장시켜 20~30대에 억만장자가 됐다는 뉴스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면서 요즘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멋모르고 벤처 분야에 뛰어드는 한인 2세가 급속히 늘고 있다. 하이텍 분야를 전공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전혀 무관한 공부를 하던 사람들까지 전공을 때려치우고 벤처를 외치고 있다.

유씨의 경우는 극단적인 케이스지만 한 건하기보다는 패가 망신하는 수가 더 많은 것이 벤처다. 수많은 벤처 캐피틀 회사중 으뜸으로 꼽히는 클라이너 퍼킨스(KP)가 미는 기업도 신문에 날 정도의 화제가 되는 것은 열에 하나 둘이고 나머지는 잘 해야 본전이다. 히트 친 기업 하나가 나머지 10건의 사업 손실을 만회해 준다.

좋은 학교를 나온 수재면 다 성공할 것으로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벤처 분야에 뛰어 드는 사람은 면면부터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벤처 돌풍의 주역을 들라면 제일 먼저 손꼽히는 사람이 짐 클락이다. 클락은 90년 특수 컴퓨터 칩 제조회사인 실리콘 그래픽스사를 차려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지난 10년간 할리웃 영화사들이 쏟아낸 화려한 특수효과는 모두 이 회사 테크놀로지 없이는 불가능했다. 클락은 95년 넷스케입사를 창립, 수십억달러를 벌며 인터넷 혁명을 미국 가정 안방까지 전파했다. 99년에는 의료보험 청구절차를 간소화하는 인터넷 거래업체인 헬시온을 설립, 또 다시 수십억달러를 벌었다.

한 사람이 이처럼 다른 회사를 연달아 설립, 세차례나 히트를 친 경우는 실리콘 밸리 사상 유례가 드문 일이다.

클락은 명문대를 나온 명문 가정 출신의 모범생이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알콜 중독자로 아내를 상습 폭행한 아버지를 둔 문제 가정 출신으로 고교시절 학교 버스에 폭탄을 장치하고 무도회장에 스컹크를 숨겨 가지고 들어오는 등 기행을 일삼아 퇴학당한 인물이다. 생계를 위해 해군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한 후 사회에 나와서도 직장을 수없이 바꿨으며 공식 이혼 경력만도 두 번이다. 두 번째 아내가 도망간 후에는 정신상담까지 받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갑부 자리를 놓고 빌 게이츠와 1·2위를 다투는 오러클사의 래리 엘리슨도 마찬가지다. 10대 미혼모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생모가 9달 된 자기를 버리는 바람에 시카고 빈민가 친척집에서 자랐다.

엘리슨이란 이름도 러시아 이민자 출신이었던 친척이 엘리스 아일랜드를 통해 미국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준 이름이다. 엘리슨은 일리노이대에 입학했으나 양모마저 죽자 2년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각고 끝에 차린 오러클사도 90년대 중반 인터넷이 뜨기 전에는 존폐기로에 선 적이 여러 번이었다.

벤처는 원래 ‘모험’이란 뜻이다. 모험에는 항상 위험이 따른다. 잘 되면 보물상자를 찾아 금의환향하지만 상어밥이 되는 것도 순간이다. 온실에서 고이 큰 화초보다는 비바람에 시달리며 자란 잡초가 더 적합하다. 비상한 머리보다는 온갖 고초를 견뎌낼 수 있는 맷집과 자신의 비전을 끝까지 실현하겠다는 집념이 더 중요하다. “이 분야에서는 미친 사람 빼고는 살아 남지 못한다”는 인텔 창업자 앤디 그로브의 말을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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