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초가삼간 태우는 한국병역법

2000-06-10 (토)
크게 작게
"한국 병무청에서는 ‘영주권자, 시민권자는 무조건 병역기피자’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아요"
A군(19)은 중학생 때 가족이민으로 미국에 온 1.5세 대학생이다. 그동안 공부하기 바빠 한번도 한국에 나가지 못하다가 모처럼 친척들과 어릴적 친구들도 만나볼 겸 이번 여름방학에 모국방문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할 계획을 세웠는데 예기치 못했던 장애에 봉착했다.

어릴적 이민온 남자 영주권자는 만17세가 되는 해에 병역면제 신청을 해야 하는데 영사관에 신청하면 허가가 나오기까지 2개월이 걸린다는 것이다. 15일 이내의 단기방문 시에는 상관이 없으나 한달 이상 장기방문 시에는 "문제가 될 수도 있고 현지에서 징집당할 위험도 있다"는 영사관 담당자의 설명에 A군은 결국 7년만의 모국나들이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생 B군(25)은 시민권자다. 한국의 호적에도 올라 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중국적자다. 유학생 부모에게서 태어난 B군은 4세까지 미국에서 자랐다. 그후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와 대학을 마치고 현재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B군은 앞으로 미국에서 계속 살아갈 계획이지만 병역기피자로 처벌받을 위험이 있어서 한국에는 나가지 못한다. 지난해 일본과 홍콩에까지 갈 일이 있었는데도 부모가 살고 있는 한국에는 들르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얼마전 한국에서 군복무중 가족이민으로 전역했던 미영주권자가 다시 한국에 나가 학업을 마치려다 남은 기간 군복무를 마치라는 입영통보를 받고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영주권자에 대한 병역면제는 해외거주라는 전제조건이 붙어있는 만큼 이미 면제를 받은 경우라도 영주귀국을 한다면 면제사유가 해제되어 병역의무가 발생한다는 것이 병무청측 주장이다.

이처럼 한국 병역법이 점차 까다로워지고 있어 미주 한인을 비롯한 해외동포들의 불편이 크다. 병무청측은 해외 이주를 가장한 병역 면탈자를 방지하고자 영주권자 또는 시민권자에 대한 병역 관리 강화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국외이주로 병역연기나 면제를 받은 사람이 국내 교육기관에 1년 이상 다닐 경우 부모나 배우자가 국내에서 1년 이상 거주하고 있다면 영주귀국으로 간주, 병역연기나 면제처분을 취소하고 병역의무가 부과된다고 한다. 종전 30세까지였던 연령기준도 35세로 올렸다.

그동안 병무비리 만연이 시행을 맡아본 관리들의 잘못 때문이었지 병역법이 느슨했던 탓은 아니다. 빈대 몇마리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우는 어리석음이 아닌지 모르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