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만국박람회 참가 낯선 한국에 ‘큰 관심’

2015-10-09 (금) 김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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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3년 고종 황제 파견 문화사절단 이민사 기원… 한국문화 유입의 시작

▶ 철도회사‘노던 퍼시픽’ 태극문양 로고 인상적… 주류사회에 신선한 영감

만국박람회 참가 낯선 한국에 ‘큰 관심’

만국박람회 참가 낯선 한국에 ‘큰 관심’
※ 광복 70주년 특집기획
【시카고 한인사회를 가다】

③ 시카고 만국박람회, 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

시카고 한인들의 초기 정착사는 명확하지 않다. 그동안 여러 한인들이 이민사를 편찬하면서 초기 이민역사를 추적했지만 정확한 사료보다는 많은 부분 구전에 의존하고 있다.


시카고 한인들은 1893년 고종 황제가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위해 파견한 문화 사절단을 이민사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6개월 동안 ‘대조선’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를 내세우고 시카고에 머물면서 조선의 문물을 세계에 알렸다. 조정의 고위관리들과 수행원, 악공들까지 포함된 대규모 참가 인원 모두 초호화 호텔에서 장기간 머물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들의 상당수는 시카고 시내 숙소에서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매일 행사장으로 출퇴근 했을 것이다. 시카고 한인들이 이들을 첫 이민의 시초로 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미주 한인 이민사의 출발지인 하와이 노동 이민보다도 20년이나 앞선다.

시카고 역시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시카고 최초의 한인교회는 시카고 한인 제일연합감리교회다. 지금은 시카고 북부 부촌 위닝이라는 지역에 성전을 짓고 시카고 이민 역사를 지켜가고 있다.

교회가 1993년 발간한 ‘교회 70년사’에 따르면 1917년 시카고시 전화번호부에 ‘코리안’으로 된 단체는 없었으나 김씨 성을 가진 3명이 기록돼 있다. 그 중 한 명은 다운타운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김경(Kim, King B. Manager)씨였다. 그는 1912년께 시카고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따라서 김씨 추정 이론으로 계산하면 당시 시카고에는 15명 정도의 한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년 후인 1923년 전화부에는 5인의 김씨가 등재돼 있어 5년 사이 대략 10여명의 한인들이 더 유입돼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시카고 거주 한인들은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하와이 농장 이민을 거쳐 유학생으로 온 사람들이 주를 이룬 것으로 이민사들을 기록하고 있다.


제일연합감리교회의 기록물 중에는 1923년 12월 찍은 ‘흥사단 시카고 지역회 창립 10주년 기념’ 사진도 있다. 이미 1913년 흥사단이 시카고 지역에 창립돼 활동했다는 증거다.

매 10년마다 인구를 조사하는 연방센서스국 자료에는 1910년 시카고 한인 인구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0년 후인 1920년 27명이 조사됐고 1930년 64명으로 늘었다가 1940년에는 39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초기 한인들은 주거지가 일정치 않았던 유학생들과 정착이 쉽지 않았던 저임금 노동인구가 주를 이루고 있어 인구 조사에 누락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카고 한인 제일연합감리교회

초기 한인들은 교회를 중심을 모여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서로를 의지하고 도움을 받았다. 시카고도 마찬가지였다. 교회의 출발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교회 연감에는 1923년으로 추정된다고 적혀 있다.

시카고 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는 미국 내 4번째 한인교회로 기록된다. 하와이에 이어 1904년 LA, 1905년 샌프란시스코, 1922년 뉴욕, 그리고 이듬해 시카고에 한인교회가 창립됐다.

이민 초기 한인교회들은 모두 감리교다. 당시 미국 내 초교파적 기독교 단체인 ‘미국 도시선교협의회’가 새 이민집단 별로 분담해 교회 건립을 도왔기 때문이다. 각 교파마다 이민자 선교를 위해 경쟁을 피하기 위해 후원할 민족을 각자 맡은 것이었다. 감리교단은 한인들을 맡았다.

시카고 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는 이전 2개의 기도모임이 통합돼 탄생한 이후 92년간 모국의 독립을 위해, 또 이주 한인들의 정석적 안정을 도우며 꾸준히 시카고 한인 곁을 지켜오고 있다. 당시 교회의 역할은 ‘민족교회’ ‘장자교회’ ‘어머니 교회’라는 모토에서 잘 나타나 있다.

교회 설립 당시 정확한 교인수를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미북 감리교회의 한 기구였던 ‘홈 미션’에는 교인수가 35~80명가량으로 기록돼 있다.

교회의 초대 창립목사가 독립선언문 33인 중 하나인 김창준 목사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2년동안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전쟁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는 북한 유공자 묘소에 묻혀 있다.


■시카고 만국 박람회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안 만국박람회’(World Colombian exposition)는 당시 조선이 ‘대죠션’(대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해 세계열강 47개국에 끼어 조선을 알리는 최초의 공식행사였다.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열린 이 박람회에 고종 황제는 장봉찬, 이승주, 정경원등 관리를 비롯해 한국의 민속, 공예 예술품 80여상자 25톤 규모였고 10명의 악공들을 파견해 전통음악을 선보이며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당당한 자주 독립국가임을 공표했다.

조선이 국제박람회에 참석한 것은 시카고가 처음은 아니다. 조선과 미국이 수교한 이듬해인 1883년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한 11명의 보빙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했다가 때마침 보스턴에서 열리고 있었던 기술공업박람회에 비공식적으로 참가해 조선 물품을 소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대규모 참가는 시카고가 처음이다.

당시 박람회 한국 대표단은 9월5일 시카고 오디토리엄 호텔에서 100여명의 각국 외교사절을 초청해 고종의 42회 생일축하연을 개최했는데 이때 메뉴에 성조기와 태극기 사이에 한글로 ‘대죠션’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이 메뉴는 시카고의 ‘1893 한국전시관(Corea Exhibit) 복원기념사업회’가 시카고의 ‘해롤드 워싱턴 대학 특별 열람실에 소장된 것을 확인해 2007년 공개했다.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자료다.

박람회 당시 시카고 트리뷴, 데일리 인터오션 등의 언론들은 조선 대표단의 복장과 전시물품등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는 등 미지의 국가에서 온 낯선 문물에 큰 관심을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 철도회사인 ‘노던 퍼시픽’의 로고가 태극기의 태극문양이다. 박람회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조선 전시관의 태극기에 영감을 얻어 회사 로고 안에 태극 문양을 넣은 것이다. 이 내용은 워싱턴 타코마 시립도서관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미지의 조선문화가 미국인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박람회에 전시된 물품의 일부는 판매되고 기증돼 현재 스미스소니안 박물관, 시카고 필드 박물관 등 미국 곳곳에 보관돼 있다.

<김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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