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계산적인 사람들

2009-06-2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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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동료, 부부, 정치가들이 싸움을 끝낼 때 자주 쓰는 영어 문구가 있다 - “서로 이의가 있다는데 동의하자”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성숙하고 사려 깊으며 이기심 없는 말이라 생각한다. 양편이 속히 그리고 조용히 져주면서 다음 일로 넘어가는 것이다.

글쎄, 싸움이 정말 그렇게 끝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말을 하고 난 후 양편 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 바보 같이 내가 왜 그랬지? 바보, 바보!”라고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건 아닐까? 부글부글 속 끓이며 아직도 상대를 경멸할 수도 있다.

이성에 따른 처세와 감정에 따른 처세는 인간 역사상 항상 대치하여 왔다. 개개인에 한해서만이 아니라 국민성을 말할 때도 그렇다. 예를 들면 독일인들은 이치를 따지고 한국인들은 감정에 치우친다는 상투적인 말이 있다. 어쨌든 이 두 처세를 단지 좋다, 나쁘다 라며 간단히 분류하는 고지식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차가운 이성’ 혹은 ‘뜨거운 감정’이라고 가차 없이 단정해 버리는 사람은 많다.


‘이성’은 이치를 따지는 능력이라 ‘계산’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데, 영어로 말할 때 사람을 ‘계산적’이라고 표현하면 그건 모욕이다. 한국어에서도 ‘타산적’이란 말은 부정적 느낌을 주어 ‘타산적’인 사람들은 뭔가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동료들을 돕는다. 도움 받은 후 아주 고마워하던 사람들은 그 도움이 대가를 바랐던 것임을 알게 될 때 크게 실망한다.

남의 문화를 배울 때 가장 어려운 것의 하나는 언제 ‘주고받는’ 상호이익의 관계가 성립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그렇긴 해도 내가 한국문화를 배울 때 가장 쉬웠던 것은 어떤 관계에선 그 상호관계가 전혀 없다는 걸 배웠을 때다.

예를 들면 선배와 후배의 경우로, 그 둘 사이에는 도움을 받고도 후에 굳이 갚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선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인간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관계를 ‘계산’해야 하니까.

하지만 ‘계산’으로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 낙천가들이 있어 왔다. 1600년대의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대표적인 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30년 전쟁을 막 치른 유럽 특히 독일은 대립이 많았고 대개는 종교적 대립이었다.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지금으로 보면 진정한 전산 과학자다운 생각을 했다. 양편의 논쟁을 기록할 수 있는 인공언어를 만들고자 했다. 컴퓨터에 입력시킬 경우 논쟁의 어떤 부분이 옳고 어떤 부분이 그른지를 정확히 꼬집어 보여줄 인공언어. 싸움을 “서로 이의가 있음에 동의하자”가 아닌 “계산을 해보자”로 끝나게 만들 언어.

‘동의’에 대한 말은 지난 주 ‘전산과 철학’이라는 학회에서 만난 어느 이름난 스탠포드 교수를 통해 다시 듣게 되었다. 그는 400년 전 라이프니츠가 그랬던 것처럼 철학논쟁의 논리를 보여주는 연구를 한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그의 연구는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 있다. 900년 전 신의 존재를 증명한 성 안셀무스의 그 유명한 ‘증거’를 컴퓨터로 재계산하여 새롭게 발전시키기까지 했다.

라이프니츠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희망을 안고 떠났다. 그 근거의 하나는 아시아 문화에서 비롯했다. 그는 한문이 중국 외의 나라들 사이에서도 대화의 방법으로 쓰이고 있음에 상당히 놀랐다. 한문에 대해 많은 오해를 했었지만, 보편 논리를 근거로 만든 ‘보편 문자’를 개발하여 잘 사용한다면 전쟁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요즘엔 인공지능 분야에서 감정을 아주 중요시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로봇들은 얼굴에 감정을 담고 있고 상대의 감정을 읽는 감지기가 부착되어 있기도 하다. 더 나아가, 로봇의 논리를 더욱 효과적이게 하기 위해 인공감정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니 이젠 더 이상 ‘냉정한 이치’ 혹은 ‘뜨거운 감정’으로 구분할 수가 없겠다. ‘뜨거운 이치’ 인 것이다. 동의합니까? 이의가 있습니까?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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