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요단상] 자연 속에서

2026-04-10 (금) 12:00:00 김인자 시인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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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하늘은 하얀 안개의 장막으로 덮여있다. 안개의 바다에 해엄치 듯 창문을 넓게 열었다. 길 건너 건물들의 형체가 사라졌다. 멀리 보이던 그라피스팍이 새하얀 물결 속에 파묻혔다. 베란다로 나가니, 나무들이 새벽빛이 없는 안개바다에 시무룩하다. 창가에 붙어 아스라이 올라간 부겐빌레아가 화려한 꽃들을 쏟아 놓았다. 받침대에 올라선 자스민, 아네모네, 군자란의 꽃들이 하얀 안개하늘에 신비한 오로라로 수채화 같다.

우리는 자연과 공존하면서도 종종 자연을 “바깥”에 있는 어떤 것처럼 여긴다. 창밖의 높은 하늘과 땅위의 나무들과 더불어 계절의 다양한 변화를, 단지 그림 속 풍경처럼 멀리 느끼곤 한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의 숨 속에, 가슴속에, 기억 속에 언제나 스며있다. 창가에 섰을 때, 자연은 언어 이전의 언어로, 존재의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조용한 숨결로 인간세상의 허무를 위로한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이 조용한 세계와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속삭인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다시 배운다. 살아간다는 것은 더 많이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느끼는 것임을.


우리는 자연을 소유하지 않는다. 잠시 그 품에 머물다 다시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겸손해지고 자연은 조용히 문을 열어준다. 자연은 인간이 지은 집이 아니라, 인간이 잠시 빌려 사는 안식처다.

새벽은 아직 겨울의 끝자락을 벗지 못했는데, 화분의 흙들은 먼저 따뜻해져 작은 잎을 밀어 올리고 있다. 우리들 세상의 원리도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그사이에 연약한 줄기 하나가 어제보다 조금 위로 솟아나는,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저렇게 아무 소리 없이 자꾸만 빛 쪽으로 기울어지는 리듬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베란다에 서서 우리내 인생처럼 한계절의 교체를 조용히 바라본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 남도 삼 백리 //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 놀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박목월 의 ”나그네“

어쩌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공존이라는 말보다도 더 단순하다. 우리는 자연을 소유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그 품에 머물다 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연을 사랑하게 되고 자연은 말없이 인간을 품어준다. 허만헤세도 85세까지 살은 인생에서, 그는 누구보다 자연의 천변만화의 유희를 가까이애서 피부로 느끼고 때로는 글로, 때로는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그는 다양한 기쁜 삶 가운데서도 자연과의 만남이 주는 기쁨이 가장 크다고 했다.

젊은 시절 바라보는 자연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또한 사진 속 배경이었고, 여행의 목적지였다. 아침햇살의 각도가 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 바람의 결이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한 그루 나무의 늙어 감을 자신의 몸과 겹쳐서 보게 된다. 자연은 말 없지만, 우리는 자연 속에서 비로소 스스로의 질문을 듣게 된다.

<김인자 시인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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