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 동양의 삭발 정치
2026-04-01 (수) 12:00:00
최형욱 서울경제 논설위원
삭발 정치는 동양권에서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종교의 영향이 크다. 불교에서 삭발은 세속의 인연과 욕망을 버리고 수행에 힘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힌두교에도 출생이나 부모 장례 등 집안 애경사가 있을 때 머리카락을 밀어 신에게 봉헌하는 관습이 남아 있다. 이들 국가에서 삭발은 결연한 의지나 정화·헌신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유교의 주요 경전인 효경(孝經)은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를 강조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한족에게 “머리털을 남기면 머리를 남겨 두지 않겠다”며 자신들의 변발 풍습을 강요하자 유학자들은 “차라리 머리를 자르겠다”며 극렬 저항했다. 조선 말 고종이 내린 단발령은 의병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이런 유교 문화권에서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른다는 것은 극단적 결의와 자기희생을 뜻한다.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정치적 삭발은 나라마다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 과거 홍콩의 삭발은 민주화 운동 차원에서 이뤄졌다. 인도·필리핀 등에서는 공천 배제에 대한 지역 정치인의 항의 수단 등으로 쓰인다. 때로는 노동자의 처우 개선이나 농민의 부채 탕감 요구에서도 삭발이 등장한다. 일본은 저항보다 사죄의 진정성을 담는 의미로 삭발한다. 간 나오토 민주당 대표는 2004년 국민연금 보험료를 미납한 사실이 드러나자 사퇴한 뒤 삭발하고 참회 순례길에 올랐다. 반면 서양의 경우 정치적 목적의 삭발은 보기 힘들다. 간혹 암 치료 기금 마련 등을 위한 연대 차원에서 삭발하는 사례는 있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한국만큼 삭발이 빈번한 나라는 드물다. 정치인은 물론 노동·시민단체 등이 극한 투쟁의 수단으로 삭발을 이용한다. 단식은 당사자의 건강을 해친다. 반면 삭발은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해 지지층을 결속시키는 데 유리하다. 하지만 정치인 개인은 주목받겠지만 정책 대결은 멀어지고 일반 국민들의 정치 혐오를 심화시킨다. 최근 국민의힘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삭발 투쟁을 보면 우리나라 정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최형욱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