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엄청난 희생을 낳는다. 총력전 시대에 오면서 희생의 규모가 훨씬 커졌다. 급속한 기술 발달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전제정의 충돌, 문명 대 문화의 전쟁으로 규정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어느 한쪽의 승리 외에 탈출구가 없었다. 프랑스 땅에서 벌어진 제2차 솜 전투가 이 참담한 전쟁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1918년 독일군 사령관 루덴도르프 장군은 미군 도착 전에 서부전선에서 승패를 결정짓고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했다. 결정적 승리를 위해 동부전선의 독일군까지 이곳으로 이동시켰다.
짙은 안개가 낀 3월 21일 독일군은 솜강 북쪽, 아라스와 라페르 사이에 주둔한 영국군 참호에 포격과 함께 독가스 공격까지 감행했다.
제1선과 제2선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궤멸 직전에 몰린 영국군은 다음 날 후퇴를 결정했다.
전선 남쪽에 있던 프랑스군과의 연락마저 끊겼다. 독일군은 프랑스군과 영국군 사이에 깊은 균열을 내며 64㎞를 파죽지세로 전진했다. 포로가 7만 명이었다. 이 공세를 통해 독일은 1914년 말 교착상태에 빠진 후 서부전선에서 단일 전투로서는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방어선은 잠시 휘어졌을 뿐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 전열을 재정비한 연합군은 3월 28일까지 두터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독일군은 전략적 승리가 아닌 전술적 승리를 거뒀을 뿐이다.
시간도 독일 편이 아니었다. 독일군의 자원이 고갈되는 사이에 충분한 장비를 갖춘 미군이 전선에 도착했다.
기세에 눌린 독일군은 최후 방어선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초기에 100만 명이 넘는 희생자와 더불어 덧없는 전쟁의 대명사가 됐던 솜은 두 번째 전투를 통해 연합군 대공세의 출발점이 되었다.
독일군이 거듭 후퇴하면서 그동안 독일 신문 1면에 반복해서 등장했던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제목도 사라졌다. 슬프게도, 전쟁 없는 세상의 꿈은 한쪽의 압도적 승리를 통해서만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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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근 / 고려대 사학과 교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