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마당에 철쭉꽃이 활짝 피었다. 바로 옆에 서 있는 배롱나무는 아직도 겨우내 말린 나뭇잎을 누렇게 달고 있는데, 그 멈춤이 무색하게 화들짝 봄을 피워 올리고 있다.
지천으로 핀 진분홍 꽃이 살랑살랑 내 마음에도 봄바람을 일으킨다.
꽃무늬 블라우스에 노란 모자를 쓰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 오래된 기억을 꺼내 따사로운 봄볕에 말리며 추억이 담긴 거리를 이리저리 걷고 싶다.
풋풋한 소녀의 마음에 행복한 미소를 담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거실 창으로 얼핏 엄마의 모습이 보여 흘끗 돌아보니 열아홉 소녀는 간 곳 없고 구부정한 노인이 서 있다.
겉모습이 낡아지고 구부러지는 동안에도 늙지 않은 마음의 나이가 반갑다. 기댈 언덕 하나 없이 시작한 남의 나라 살이, 새벽부터 동분서주했던 중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도 쇠잔하지 않은 마음 밭이 있어서 고맙다.
주름골 깊어지는 얼굴로도 봄바람에 설레며 어린 시절의 분홍빛 추억을 끄집어내는 오늘의 여유에 감사한다. 하루하루 무겁게 내리누르던 먹구름 속에서도 그 뒤에 밝음을 기대하던, 그 건강한 마음에 감사한다. 그 순수함이 있어서 어쩌면 그 모진 풍파를 견뎌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철이 없어서 오히려 순수했던 그 마음은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세상을 좋게만 보았다.
삶을 살아 내면서 세상의 어두운 면도 만나고 나쁜 경험도 하면서 이 세상이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배운다. 그래도 잃지 않고 붙들고 있던 따뜻한 마음의 결이 다시 새 힘을 얻게 하고 거친 길을 다독이며 걸어갈 수 있게 했다.
자전거 페달을 힘겹게 밟으면서도 양팔을 벌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즐기는 젊은 청년을 만날 때, 마켓의 계산대에서 돈이 부족해 보이는 앞사람의 물건 값을 선뜻 지급해 주는 어느 노인의 넉넉한 미소를 만날 때, 감기 몸살로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때 몰래 놓고 간 지인의 따뜻한 국그릇을 발견할 때, 얼었던 땅을 녹이는 봄기운처럼 이런 기운은 우리들의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나쁜 경험으로 잔뜩 구겨진 마음을 툭툭 털게 하고 나의 마음도 어디 보탤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게 한다.
쇼핑하고 계산하기 위해 선 기다란 줄에서, 지루함을 달래다 문득 내 앞에 선 어느 할머니의 얼굴에 환하게 번지는 생기를 만났을 때, 그 할머니의 시선이 진열대의 상품권 카드에 오래 머무는 것을 보고 상상을 해 본다.
그 카드를 받아 들고 좋아하는 아들을 떠올리는 엄마의 마음을, 혹은 달려와 안기는 손자 녀석의 앙증맞은 몸짓을. 나도 덩달아 그 생기에 젖어 지루함을 잊고 순간 방긋 웃는다.
세상은 늘 어지럽다. 전쟁과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는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의 작은 마음은 너무나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면 나의 이런 작은 손길이 의외로 누군가의 어두움에 작은 빛이 되기도 하고, 추운 그들의 하루에 훈훈함을 주기도 함을 알게 된다.
미리 와서 봄을 알리는 철쭉은 진분홍 화사한 미소로 찬 기운을 밀어내고 있다. 그 주변으로 아지랑이 아른거리며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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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옥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