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은 AB형에 가깝다

2026-03-18 (수) 08:15:10 김지나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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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슴 뛰는 책을 접했다. 한국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문고에 가서 좋아하는 책을 고르고 어떻게 미국까지 가지고 오느냐를 고민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꼭 읽어야 하는 책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열되어 있지만 나는 그들의 선택을 굳이 피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베스트셀러 책이 무엇인지, 유명한 작가의 책이 나왔는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을 받은 책은 무엇인지 정도는 섭렵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냥 쓱 스캔하는 정도로만 하고 마음에 쏙 들어오는 책을 찾는 건 분명 내 몫이다.

이번에는 작가 황석영 님의 철도원 삼대와 할매를 필두로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두어 개와 철학서 몇 권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 발견한 책이었다. 점잖은 진한 그린 색 표지에 명조체로 제목이 쓰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작가만의 고집스러운 묵직함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외국 작가가 쓰고 한국어로 번역한 느낌인데 미사여구를 쓰지 않은 제목이라 꾸미지 않으면서 꼭 할 말만 하겠다는 굳은 결의와 의지가 보였다.

제목으로만 보면 자기 자술서 같은 자아 성찰 분위기가 나지만 이 책 안에는 철학, 심리학, 문학, 신경과학을 넘나들며 한 가지 주제 즉,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 삶에서 관계로 인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깊이 있고 폭넓은 시각으로 우리로 하여금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책이라는 편집자의 말이 나를 사로잡았고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전반적인 내용은 사람이 결국은 관계를 가지며 살 수밖에 없고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고 작가의 다채로운 문학적 시선과 다른 학자들의 보고서로 서술하는 형식이다. 사람을 안다는 건 결국 상대방을 알아가는 것인데 그냥은 아니다. 한 번 보고 그 사람을 안다는 건 있을 수 없고 함께 깊은 대화로 소통하면서 정말 그 사람의 마음으로 다가가 바라보고 느끼며 상대를 가장 편한 상태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그 상대방을 안다는 것으로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어떤 문장에서는 눈물이 났다. 가장 가까이 가장 오래 지내는 가족에게서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했다. 문득 바라보게된 아내의 옆모습에서 햇살이 비친 얼굴에 그녀의 깊은 내면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에 작가는 눈물을 흘렸다. 모두에게 힘이 있고 유쾌했지만 정작 가족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음에 후회하는 사실적인 내면의 반성 또한 이 책을 진정성 있는 책으로 완성시켰다.

톨스토이의 글도 인용되었다. 물은 늘 똑같다. 그러나 모든 강은 어떤 데서는 폭이 좁고 물살이 빠르다. 또 어떤 데서는 폭이 넓고 수면이 잔잔하다. 맑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고 진흙탕이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사람도 똑같다. 모든 사람은 모든 성품으로 성장할 싹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싹을 언제는 하나만 드러내고 언제는 두 개 드러낸다. 어떤 사람이 어떤 데는 전혀 그 사람 같지 않을 때가 자주 있지만, 여전히 동일한 사람이다.

즉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바라봄으로써 그 상대방이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를 이해해준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단지 어떤 기술을 익혀서 숙달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는 상대방의 상황을 잘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와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다. ‘너랑 달라’라고 단정 짓기 전에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고 그 사람은 어떻게 자랐을까? 라는 의문과 깊은 그 내면으로 들어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율이 필요하다.

요즘엔 손절이라는 말을 무슨 유행 단어처럼 말한다. 손절은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과의 접촉을 차단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다. 특히 요즘 시대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기에 나랑 맞지 않으면 가위로 종이를 잘라버리듯 한순간에 손절한다 해도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무 자르듯 잘라서 버리면 그만이지만 무를 소금에 절이면 아삭한 장아찌로 오래 먹을 수 있게 된다. 오래된 것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명품을 대하는 진정한 자세다.

봄은 인간혈액형으로 구분하면 AB형에 가까운 듯하다. 어제는 에어컨을 켰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감정의 요동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아침엔 햇빛이 강하다가 오후엔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날이 꼭 AB형 같아 이런 들쑥날쑥한 봄이 좋다. 친구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하는데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친구에게 먼저 전화 한번 해볼까? 책을 덮은 김에 봄 처녀처럼 봄바람이 불었다며 웃어넘기지 뭐.

<김지나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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